물결님 특별히 기억에 남는 요리 경험이 있나요? 저는 집에서 밥을 잘 해먹지 않는 편이에요. 제가 하는 음식은 왜인지 맛도 모양도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재료에 들인 돈과 시간을 생각하면 그냥 사 먹는 게 낫겠다 하는 마음이랄까요? 그런데 딱 한 번, 나 정말 요리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명절을 맞아 할머니 집에 갔다가 고방(창고)에서 오래된 레트로풍의 유리 접시 세트를 발견한 순간이었죠.
투명한 유리그릇은 활짝 핀 꽃잎 모양에다 중간에는 연한 주황색 포인트도 있었어요. 여기에 음식을 얹으면 맛이 있든 없든 행복하겠더라고요. 그 그릇을 신문지에 싸서 집에 가져가 씻어 말리고, 어떤 요리를 할지 고민해 마침내 만들어 얹는 순간까지, 모든 순간이 즐거웠어요. 어떤 도구를 쓰는 지가 요리를 대하는 태도를 바꾼다는 걸 경험했어요. 지금도 그 그릇을 가장 좋아해요. 오늘 소개할 브랜드는 물결님에게 그런 떨리는 경험을 선사해 줄 키친웨어 브랜드랍니다.
물결님 장인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오르나요? 우리는 특정 분야에서 오랜 경험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대체 불가능한 경지에 오른 이들을 장인이라 불러요. 그리고 이들은 대체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깊은 진정성과 자부심을 가지고 정통하려고 하는 철저한 '장인 정신'을 가지고 있죠. 오랜 시간 한 가지 일을 했다고 모두가 장인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이미 궁극에 있음에도 끝없이 배우고 탐구하는 정신으로 주변 이들에게 자극을 주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장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물결님께 소개하고 싶은 우리나라의 장인이 있어요. 바로 40년간 칼 작업에만 몰두해온 명도산업의 임정신 장인이에요. 그가 처음 칼 연마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조각칼은 길에 버려지는 양철을 갈아 나무에 꽂아 파는 제품에 불과했어요. 그렇다 보니 칼을 역할을 제대로 하지도, 위생적이지도 않았죠. 줄줄이 문을 닫는 칼 공장들을 보며 그는 오래 잘 사용할 수 있는, 세상에 없는 칼을 만들겠다고 다짐해요. 그리고 마침내 쉽게 녹슬지 않고 단단한 스테인리스 조각칼을 국내 최초로 만들어냅니다.
가능성의 확장 임정신 장인이 새롭게 내놓은 칼이 딱 그랬어요. 어떤 요리와 활용에도 무리가 없도록 오직 한식을 위해 탄생한 칼이에요. 식도, 과도, 중식도 총 3가지의 칼에는 모두 '계단식 단층'이 나있는데요. 두꺼운 칼날을 조금씩 깎아 만든 단층 덕에 재료가 잘 들러붙지 않고, 절삭면과 재료가 닿을 때 단층이 틈을 만들어 더욱 쉽게 잘린다는 장점이 있어요.
물결님 명작은 디테일이 아름답다는 말이 있어요. 칼 마다의 쓰임과 특징을 달리 고려한 점도 특징이죠. 과도는 과일을 손으로 잡고 깎을 때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날 안쪽에 곡선을 넣어 연마했어요. 또 기본적으로 무게를 이용해 재료를 깎도록 만든 칼인 중식도는 날부분을 최대한 얇게 깎아내 손목에 무리를 줄였고요.
지금이야 계단식 단층을 가진 칼이 보편화됐지만 임정신 장인이 처음 이 칼을 개발할 때는 그간 칼을 개발해온 40년의 시간보다 힘든 시간이었다고 해요. 최적의 단층 넓이와 각도, 깊이를 찾기 위해 칼날을 하나하나 깎으며 4년이란 시간 동안 무려 40,000개의 실패작을 만들어야 했죠.
임정신 장인은 장인으로서 살아온 오랜 시간과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깨어짐의 노력을 거듭했어요.그간 칼을 만들어온 모든 방식을 내려놓고 실패와 부딪히면서 연마석부터 기계까지 모두 새로 고안해야 했던 괴롭고 힘든 시간을 통해 마침내 새로운 경험을 구현했죠. 그렇기에 임 장인이 내놓은 이 칼은 무언가 달라도 확실히 달라요. 우리는 단순히 칼을 사는 게 아니라 장인의 기술과 가치로움을 사는 거예요.
재해석: 옛것을 새로운 관점으로
그래서 오늘 소개하는 브랜드가 임정신 장인의 명도산업이냐고요? 아니요. 오늘 물결님께 소개할 브랜드는 장인과 함께 각각의 제품에 고유한 장신정신과 깊은 서사를 담아내는 키친웨어 브랜드 '헤리터(Heriter)'입니다. 임정신 장인도 헤리터와 함께하는 장인 중 한 명이에요.
임정신 장인의 칼이 한국다움을 이음과 동시에 새로운 경험으로 구현될 수 있었던 데에는 헤리터가 헤리티지를 바라보는 남다른 관점이 큰 역할을 했어요. 헤리터는 단순히 전통기술이나 유산을 그대로 살리는 것이 아니라 현시대의 생활에 맞춰 재해석하는 것에 정체성을 둬요. 뛰어난 헤리티지를 잘 계승하기 위해서는 현재에 불필요한 재료와 요소를 과감하게 배제시키고 새로운 니즈는 충족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죠.
온고지신의 정수 과거를 생각해 보면 예전에는 나무를 사용한 도마를 자주 볼 수 있었어요. 지금도 할머니 집에 가면 오래된 원목 도마가 부엌 한켠을 차지하고 있죠. 이후 차차 가공이 편리한 플라스틱 재료가 보편화되면서 나무 도마는 좋지만 비싸고 무거운 제품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어요. 나무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자연스레 줄어들던 시기 오히려 자극을 얻은 장인도 있어요. 1939년에 설립돼 2대째 이어 목제품을 만들고 있는 대석목재의 한만일 대표입니다.
한만일 대표는 나무 만이 줄 수 있는 고유한 편안함과 힘이 있다고 믿었어요. 자연이 주는 심리적인 안정감부터 지구 환경을 거스르지 않고 사람과 함께 나이 들다 마침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점까지, 나무는 따스한 매력이 넘치는 재료라고 생각했죠.
원목 도마는 그 단단함 덕에 칼과의 조화가 뛰어나고 사용할수록 서로 다른 매력을 가진 모습으로 에이징 되어 다른 재료와는 비교될 수 없는 강점이 있어요. 그래서 헤리터와 함께 최상위 등급의 원목을 사용하는 '기본'으로부터 도마가 시작된다는 철학은 지키되, 현대의 주방에 자연스레 어울릴 도마를 고안하기 시작해요.
오랜 개발과 테스트 기간을 거쳐 마침내 보관이 쉽고 디자인적으로도 뛰어난 도마가 세상에 나왔어요. 바로 헤리터의 시그니처, <팔각 도마>에요.
도마의 용도를 넘어 나이프 블록처럼 칼을 보관할 수 있도록 수납 스탠드를 함께 설계한 것이 특징이에요. 스테인레스 소재의 프레임은 도마를 세워 빠르게 물기를 건조할 수 있게 해 갈라짐을 방지하고, 칼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감싸주어 여러 도구를 안전하고 오래오래 사용할 수 있게 해줘요.
헤리터와 장인이 함께 만든 제품들은 사용할 사람의 생활을 헤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는 느낌을 줘요. 물결님의 주방 생활에 실용성과 편리함은 더할 뿐만 아니라, 어디에 두어도 작품이 되도록 역할을 하죠.
더 나은 쓰임을 향해 30년 이상 전통 방식을 고수하는 도자 그릇 브랜드 '이도'와 헤리터가 함께한 <포터리 시리즈>도 마찬가지예요. 이들은 수공예 도자가 갖는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키면서, 작지만 사용성을 높일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를 찾아 도입합니다. 도자기가 기존의 오브제 형식에만 머무르지 않고 쓰임이 좋은 생활 도자로서 대중화될 수 있기를 바랐어요.
먼저 잘 사용하지 않는 접시의 굽을 없애고 뒤집어 일반 찬기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어요. 또 공기 그릇엔 하단 쉐입에 각을 주어 손에서 균형을 잃고 미끄러지는 상황도 방지했어요. 굽에는 아치형의 홈을 넣어서 동양적인 곡선을 살림과 동시에 설거지 후에 물이 쉽게 빠지도록 돕는 배수로 역할을 하게끔 했죠.
디자인적으로는 색감이 강한 한식 특성상, 요리가 메인이 될 수 있도록 강한 컬러를 배제하고 풍화 침식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그릇 표면에 연출해 자연 그대로의 질감을 느끼도록 했어요. 각각의 그릇을 쌓아두었을 때 적재된 형태 또한 멋스럽죠. 기계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도예 만의 매력에 실용성을 결합하기 위해 다각도로 고민한 흔적이 보여요. 덕분에 오랜 아름다움의 도자를 더 가까이, 자주 사용할 수 있게 됐어요.
그 첫 시도는 양유완 유리 작가와 함께 했어요. 양유완 작가는 유리를 녹여 빛과 자신의 숨결을 가둔 작품을 만들고 있어요. 투명하고도 반짝이는 <눈 플레이트>는 유리 덩어리에 순은을 얹어 핸드 블로잉 기법으로 만들어져요. 유리가 팽창하며 자연스레 갈라지는 순은이 마치 내려앉은 눈을 떠올리게 하죠.
함께 출시한 <힐 글라스>는 한국 전통 굽잔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어요. 잔을 안정적으로 잡을 수 있도록 전통 찻잔의 굽 형태를 빌렸어요. 그런 다음 힐에 빛이 통과되어 반짝이는 효과를 주도록 기포를 불어 넣고 헤리터의 상징이 되는 여러 컬러를 가미했죠. 이번 컬렉션은 전통에서 얻은 모티프가 이렇게나 세련되게 연출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어요. 전통적이라는 말이 더는 진부하다는 의미가 아님을 실현했죠.
최근에는 전통을 계승한 아름다움을 세련되게 풀어내는 가구 브랜드 ‘이스턴 에디션’과 함께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기도 했어요. 헤리티지가 깃든 현대의 주방이 어떤 모습인지 물결님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었죠. 장식성이 배제된 미니멀한 공간에 셰프를 초청해 전통주를 페어링 한 다이닝을 대접하고 두 브랜드 제품을 조화롭게 경험할 수 있게 했어요.
헤리터가 헤리티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는 건 더 나은 어울림을 찾아 흩어진 가치를 이어 나가는 과정 같아요. 과거의 가치와 현대의 가치를 잇고, 과거의 사람과 현대의 사람을 이어 나가기 위해 가장 탁월한 형태를 고민하며 나아가요.
그 덕에 헤리터가 있는 주방에서는 요리를 구상하고 만들어 내어놓는 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가치를 가장 명료하게 느낄 수 있어요. 도구를 사용할 이들을 생각하며 오랜 시간 고민하고 시도한 장인의 시간,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는 헤아림, 그 음식을 받아볼 사람이 느끼는 감동이 모두 헤리터 하나로 이어져 있으니까요.
헤리터는 지금도 끊임없이 어떤 점들을 이어 한 편의 작품으로 탄생시킬 지 고민하고 있답니다.
재료를헤아려잘다스린다라.. 어쩌면 돌멩이레터의 매 호를 작성하는 과정이 하나의 요리를 만드는 과정 같기도 해요. 물결님이 어떤 음식을 좋아할지 생각해 요리를 구상하고, 맛있게 조리해서 내어놓는 것까지 말이에요. 내일이면 돌멩이레터를 통해 물결님들을 만난 지 1년이 되어요. 그간 잘 해왔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요. 오늘 제 글이 말하길 맛있는 요리를 완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앞으로는 글을 넘어 우리가 나누는 가치를 어떻게 더 단단하고 분명하게 키워갈 수 있을지 고민해보려고요. 물결님 덕분에 물결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어요. 늘 고맙습니다.
🪨 오늘 돌멩이를 던진 이는 에디터 모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건강한 마음에 새기는 좋은 이야기로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