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님은 ‘수건’하면 어떤 게 떠오르나요? 많진 않지만 저는 몇 가지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요. 돌멩이레터 42호 | TWB
흡수율
물결님은 '수건'하면 어떤 게 떠오르나요? 많진 않지만 저는 몇 가지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요. 하나는 학창 시절의 기숙사인데요. 입사해 보니 룸메이트나 친구들 수건이 제각각이더라고요. 집에서 쓰던 걸 그대로 가져온 친구, 새로 장만해온 친구. 알록달록한 색부터 회색, 검은색도 있었고 작은 옷장의 많은 공간을 차지할 만큼 두툼한 수건도, 한 구석에 몰아넣고도 남는 얇은 수건도 있었어요. 사실 수건은 집에서 들고나올 일이 잘 없잖아요. 그때 처음으로 수건에도 쓰는 사람의 취향과 생활이 담길 수 있구나 생각했던 것 같아요.
또 다른 기억은 호텔 수건이에요. 집에서 들고나올 일이 잘 없다고 했지만, 우리 가족은 꽤 오랫동안 호텔에도 수건을 들고 갔었어요(!). 어른이 되어 집안의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호텔 수건을 써보게 되었죠. 평소에 쓰던 것보다 크고 두꺼운 수건을 쓸 때 아, 지금 호텔에 와있구나 체감하곤 한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브랜드는 이런 '수건'에 진심인 곳이에요. 수건에 개인의 취향을 담고, 업계 최초로 '호텔 수건' 유행을 불러온 '타올가게봄(TWB)' 이야기입니다.
- 초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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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의 본질, 흡수(吸水)
타올가게봄(이하 TWB)은 벌써 13년째 수건을 만들고 있는 브랜드예요. 'Only Towel and All About Towels'라는 슬로건을 걸고 말 그대로 수건과 수건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결님 집에도 수건이 있죠. 어제도 오늘도 사용한 일상적인 물건이고, 샤워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꽤 신경 써서 고르는 샤워용품 중 하나일 거예요. 하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수건은 그저 판촉물이란 인식이 지배적이었다고 해요. 축 개업, 누구누구 돌잔치, 환갑…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이름과 날짜가 커다랗게 자수로 박혀 있거나 날염 인쇄된 수건이 대부분이었던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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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B
이렇게 수건이 판촉물로만 여겨지면 두 가지 제한이 있어요. 수건은 크게 그라운드(ground)와 파일(pile)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파일은 쉽게 말하면 털이에요. 수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이는 올 하나하나를 가리킵니다. 그라운드는 그런 올이 박힐 수 있는 밑바탕이고요. 그라운드는 수건의 부드러움 정도에, 파일은 촉감과 흡수율에 영향을 줘요. 판촉을 염두하고 만든 수건은 글씨가 잘 써지는 게 최우선이에요. 자수를 놓아야 하니 대부분 조직이 빽빽한 그라운드를 쓰게 되죠. 게다가 파일이 길면 자수를 놓기 어려울뿐더러 인쇄는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에 판촉용 수건은 파일이 짧을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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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B
TWB 김기범 대표는 언젠가 우리나라에도 그냥 어쩌다 보니 생긴 수건을 쓰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수건을 골라 쓰는 문화가 생길 거라고 확신했어요. 40년 넘게 수건 유통매장을 운영하던 부모님의 반대에도 그라운드 밀도를 낮추고, 파일의 길이를 늘여 부드럽고 흡수율 높은 수건을 만들었죠. 그것도 아무런 인쇄도 자수도 화려한 패턴도 없는 무지 수건을요. 당시엔 숙박업소나 사우나에서나 볼 수 있었던 무지 수건에 좋은 품질을 더해 수건의 본질에 집중했어요. '마치 호텔에서 쓰는 수건 같다'는 고객의 후기를 놓치지 않고 이를 마케팅에 적극 활용하며 지금의 TWB로 성장하기 시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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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박사의 타월 가게
'타월가게봄'이란 이름은 '김기범이 하는 타월 가게'라는 뜻의 일본식 표기에서 왔어요. 이자카야처럼 단어 뒤에 '야'가 붙으면 무엇무엇 '가게'라는 뜻이 되는데요. 원래 일본에서 사업을 할 계획이었던 김기범 대표는 김기범의 일본식 발음인 키무 기보무에서 보무를 따오고 타월만을 취급하겠다는 뜻을 담아 '타오루야 보무'란 브랜드 이름을 지어뒀어요. 하지만 당시 후쿠시마 방사능 사태가 일어나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이를 '타올가게봄'으로 바꾸게 되었죠. 이후 2016년 정식 쇼룸을 오픈하고 글로벌 확장을 고려해 프리미엄 타월 브랜드 'TWB'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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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B
이야기가 길지만, TWB란 이름에는 여전히 '김기범이 하는 타월 가게'라는 정체성이 녹아 있어요. 오직 수건에만 집중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수많은 브랜드와 활발히 콜라보레이션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특히 더 그래요. 차분한 느낌의 TWB 제품만 보면 잘 상상되지 않지만, 김기범 대표는 학창 시절 오아시스, 라디오헤드 등 90년대 밴드 음악의 열성 팬이었어요. 지금도 자신을 일명 '90년대 록 키드'라 칭할 만큼요. 단순히 음악만을 사랑한 게 아니라 음악과 연결된 패션, 미술, 스포츠 등 문화 전반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섹스 피스톨즈의 베이시스트였던 시드 비셔스의 스타일리스트가 비비안 웨스트우드였다든지,
벨벳 언더그라운드 앨범의 재킷 이미지가 앤디 워홀의 작품이라든지 하는 것들이요.
시시콜콜한 사실들이 문화 전반에 걸쳐 이어져 있다는 게 재미있었어요."
(29cm, 20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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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반전이 있어요. 굉장히 미니멀한 인상을 주는 TWB와 달리 김기범 대표는 자칭타칭 맥시멀리스트예요. 제품을 파는 만큼 사기도 정말 많이 산다고 합니다. 물결님이 평소에 '고르고 구매한다'는 인식을 할 수 없는 제품까지도 말이에요. 예를 들어 옷걸이도 옷걸이만 만드는 브랜드를 찾아서 구매해요. 다른 게 브랜드가 아니고 그런 전문성 하나하나가 다 브랜드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브랜드에 대한 이런 애정의 배경엔 제대 후 다녀온 일본의 영향이 커요. 김기범 대표는 일본에서 유학할 당시 패션 브랜드는 물론이고 각종 리빙·라이프 스타일 브랜드 및 브랜딩에 눈을 뜨게 됐어요. 빔즈 같은 편집숍이나 백화점, 브랜드 매장을 매일 드나들며 구경하는 것이 취미였죠. 문화와 예술에 대한 학창 시절의 관심이 '브랜드'로 옮겨간 거예요. 음악을 사랑할 때 그랬듯이, 브랜드도 보이는 부분뿐 아니라 역사와 제품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브랜드가 그 자부심을 표출하는 방법을 지켜보며 브랜드 그 너머를 동경했어요. 브랜드 자체를 향한 김기범 대표의 사랑이 TWB에 그대로 묻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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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수건에 다시
예술가처럼 브랜드에도 각자 섬세한 결이 있다는 걸 일찍이 알았던 김기범 대표는 빈 수건에 다시 브랜드의 이야기를 채워보기 시작했어요. 생각해 보면 수건은 무언가를 그리기 참 좋은 물건이잖아요. 딱히 특별한 모양을 할 일도 없고 입체적으로 생기지도 않았으니까요. 자수나 패턴을 놓을 수 있고, 때에 따라 수건 전체에 그림이나 글씨를 프린트하거나 직조할 수 있는 평면이라니. 수건은 실용성을 갖춘 하나의 캔버스인 셈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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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B는 '어떤 호텔은 방해금지 카드 대신 'Do Not Disturb(방해하지 마세요)'가 적힌 수건을 문고리에 걸어둘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상상력을 발휘해 가상 호텔을 컨셉으로 한 시리즈를 내놓았어요. 이어 가상 세탁소 시리즈, 세계와 우리나라의 도시를 색과 글씨로 표현한 시티 시리즈 등을 선보였고요. 특히 시티 시리즈는 도시의 각기 다른 매력을 수건에 간결하면서도 강렬하게 담아내 좋은 반응을 얻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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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 디자인뿐 아니라 다른 브랜드와도 활발히 소통하며 다양한 콜라보레이션을 시도했는데요. 김기범 대표는 기존 TWB 제품에 다른 브랜드 로고만 추가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봤어요. 그래서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할 때마다 해당 브랜드 공부를 엄청 열심히 한다고 해요. 가끔은 오히려 적자가 나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브랜드가 만나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나가는 일의 매력을 포기할 수 없었죠. 모두 '브랜드' 자체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기범 대표의 뜻이 담긴 행보예요.
콜라보레이션하는 브랜드의 종류는 무궁무진해요. 설화수, 비욘드 등 뷰티 브랜드나 런드리고, 삼성 그랑데처럼 수건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브랜드부터 부동산 정보 플랫폼 직방, 캠핑 브랜드 하이브로우, 태극당, 로이드, 갤럭시 Z플립 등 조합이 잘 상상되지 않는 브랜드도 있답니다. 서울금천경찰서나 국립중앙의료원, 최근 방영된 TV 프로그램 슬기로운 산촌생활까지 수건이 있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제한을 두지 않고 협업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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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B는 업송용 수건으로 여겨지던 '무지 수건'을 호텔 수건으로 완전히 인식을 바꿨던 것처럼, 이제 반대로 다양한 글씨나 디자인이 들어간 수건을 판촉물에서 '브랜드 제품'으로 바꾸고 있어요. 매일 쓰는 거니까 좋은 것을 쓰고 싶은 고객의 마음을 품질로도 브랜딩으로도 만족시키고 싶은 거죠.
브랜드란 혼자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아야 브랜드가 되는 거라고 김기범 대표는 말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요. 올해 13년 차에 들어선 TWB는 계속하는 브랜드가 되는 것이 목표에요. TWB는 지금껏 그래왔듯이 수건의 본질에 충실하고 한편으론 꾸준히 재밌는 시도를 할 거예요. 그 '계속'의 힘으로 진정한 '브랜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니까요.
2월 2일 목요일,
돌멩이레터 43호가 발행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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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comment ✏️
오직 수건만 다루는 브랜드를 소개하기로 한 뒤, 과연 수건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사실 의문이 들었는데요. 이 작고 간단한 사물에도 브랜드의 철학이 이토록 듬뿍 담길 수 있다는 게 신기해요. 돌멩이레터를 쓰면서 매번 느끼는 사실이지만요. 표준국어대사전 흡수 1번은 물을 빨아들임(吸水)이고 흡수 2번은 빨아서 거두어들임(吸收)이에요. TWB가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흡수 1번과 2번 모두를 충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 외부의 것을 자유로이 받아들이기란 참 어려운 일이죠. 어떤 것과 만나도 브랜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해야 하고, 동시에 정말 어떤 것과도 만날 수 있을 만큼 유연해야 하니까요. 브랜드는 브랜드 밖으로부터 얼마큼을 흡수하고 얼마큼을 막아낼 것인지, 즉 적절한 흡수율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따라 좌우되는 것 같아요. 얼마간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오늘은 물결님도 주변을 둘러보고 브랜드나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흡수했는지 또 흡수할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는 거 어때요?
🪨 오늘 돌멩이를 던진 이는 에디터 초록입니다.
공간과 텍스트를 좋아하고 이 둘의 힘을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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