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님, 저는 가끔 ‘그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세상을 나눠보곤 해요. 예를 들어 돌멩이레터 38호 | 일광전구
꼭 필요하진 않지만
물결님, 저는 가끔 '그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세상을 나눠보곤 해요. 예를 들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이렇게 말이에요. 물결님도 한번 해볼래요? 기준을 조금 엄격하게 세우면 전자에 들어가는 존재는 아마도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저 같은 경우 물은 꼭 필요하지만 탄산음료는 그렇지 않아요. 글은 꼭 필요해도 노랫말은 없어도 괜찮고요. 기억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꼭 사진으로 남길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갑갑한 속을 탁 풀어주는 탄산음료와 문득 흥얼거리게 되는 노랫말, 순간을 기록하고 자주 들여다볼 사진이 없는 삶은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요. 아이러니하지만 우리에겐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백열전구 하면 단번에 떠오르는 브랜드, '일광전구'도 같은 생각을 했어요. 우리 곁을 오래도록 지키는 것들에는 표면적인 기능 너머의 가치가 있다는 신념으로 꼭 필요하지 않지만 필요한 '빛'을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은 빛의 역사만큼이나 긴 일광전구의 이야기를 물결님께 들려드릴게요.
- 초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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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아니고 기회
선택의 연속, 위기를 기회로. 역사가 긴 브랜드나 기업을 소개할 때 흔히 쓸 수 있는 문장인데요. 일광전구만큼 이 문장이 잘 어울리는 곳은 없을 것 같아요.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광전구는 정말 많은 위기를 겪었어요. 첫 번째 위기는 1961년에 찾아옵니다. 현 김홍도 대표님의 부모님은 대구 서문시장에서 평화전구의 대구 대리점을 운영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평화전구 부도 소식을 들어요. 협상 끝에 평화전구로부터 전구 생산 기계를 현물로 받아 공장을 열게 되는데 그게 바로 ‘일광전구공업사’예요. 말 그대로 위기 속에서 회사가 탄생한 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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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전구
이제 막 농촌에 전기가 보급되고, 조명이라고 해봐야 백열전구가 대부분이었던 시기라 일광전구공업사는 몇 년간 순조롭게 사업을 이어 나가요. 그러다 1990년대에 들어 중국이 급부상하면서 전구 업계 전체가 어려워집니다. 설상가상으로 1997년 IMF가 터지면서 일광전구도 큰 타격을 입었고요. 이즈음 현재 김홍도 대표님이 일광전구를 이어 맡게 돼요. 전구 생산업체가 반 이상 사라진 상황에서 줄어든 매출을 3년 이내에 정상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죠. 생산 비용을 줄여 가격 경쟁력을 만들고, 그동안 일광전구 대리점에만 공급하던 최고 품질의 전구를 최저가에 다른 회사로 납품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20만 개로 줄어들었던 백열전구 생산량을 10개월만에 100만 개 수준으로 회복시키며 일광전구는 다시 안정적인 궤도를 달립니다. 세 번째 위기는 2008년에 또 찾아왔어요. 잠시 전구에 관해 설명하자면, 백열전구와 LED 전구는 같은 전구 같아 보여도 제품군이 전혀 달라요. 백열전구가 탄소를 태워 빛을 낸다면, LED는 전자제품에 가깝거든요. 전 세계적으로 탄소배출에 대한 관심이 커지던 2008년, G8 정상회담에서 에너지효율이 낮은 백열전구를 퇴출하자 는 결의안이 확정됐어요. 우리나라도 세계적인 흐름에 맞춰 2014년부터 가정용 백열전구 생산과 수입을 중단하기로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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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전구
일상 속 전구는 빠르게 LED로 교체되었고, 백열전구를 생산하거나 취급하던 회사들도 서둘러 LED로 방향을 틀었어요. 일광전구에게는 큰 흐름을 따라갈지, 자신만의 길을 찾을지 선택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이었어요. 2013년, 어쩌다 보니 국내 유일의 백열전구 제조사로 남게 된 일광전구는 남겨지는 쪽이 아닌 살아남는 쪽을 택합니다. 그렇게 지금 물결님이 아는 ‘일광전구’라는 브랜드가 태어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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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전구
물결님은 어떠세요? 물결님이 오래 해왔고 또 잘할 수 있는 어떤 일이 어느 날 무려 세계적인 흐름에 휩쓸려 떠내려가 버린다면 말이에요. 아무리 위기는 곧 기회라지만 저라면 많이 혼란스럽고 황망하기도 할 것 같은데요. 김홍도 대표님은 이런 상황을 단호하게 '기회'라고 판단했어요. 한 회사를 이끄는 경영자로서 백열전구가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것도 있지만, 이 판단에는 대표님의 신념도 녹아들어 있습니다.
백열전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이유를 물으면 김홍도 대표님은 약 100만 년 전 최초로 불을 사용한 인류 이야기를 꺼내요. 불은 어두운 공간을 밝히기도 하고 추위를 막아주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불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였다는 사실이라고요. 거기서부터 문학과 예술, 값을 매길 수 없는 낭만이 탄생했어요. 백열전구는 그런 모닥불의 낭만을 구현할 수 있어요. 텅스텐 필라멘트를 태우는 건 모닥불을 태우는 것과 비슷하거든요. 사업성을 생각하기 전에 백열전구를 보면 '마음이 따뜻하고 아름답다'는 본능이 먼저 동한 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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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전구
2013년, 창립 50주년을 맞아 일광전구는 'We Make Light'라는 짧고 간결한 슬로건을 내걸어요. 그저 보기에 아름다운 빛에 머무르지 않고 '공간과 시대를 밝히고 삶에 온기를 주는 빛'을 만드는 브랜드로 거듭납니다. 이런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대대적인 리브랜딩도 거쳤어요.
이 과정엔 디자인 스튜디오 064의 권순만 대표님의 역할이 컸답니다. 전구 패키지 디자인 작업으로 일광전구와 처음 만난 이후, 권순만 대표는 조명과 전구라는 매력적인 오브제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그동안 전구는 산업 제품의 성향이 강해 디자인이나 브랜딩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분위기였거든요. 의뢰받은 패키지 디자인에 10만큼 시간을 할애했다면, 브랜드 리뉴얼 제안서를 만드는 데 90만큼의 시간을 썼어요. 그때 만든 제안서만 30개가 넘는다고 해요. 그 끝에 김홍도 대표님은 064 권순만 대표님에게 일광전구 디자인·브랜드 총괄을 맡겨요. 제품의 패키지부터 홍보, 마케팅까지 모두 바뀌기 시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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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전구
또 다른 큰 변화는 전구에서 조명으로 제품의 범위를 확대했다는 점이에요. 일광전구는 백열전구에 대한 신념을 지키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흐름을 무시하지도 않았어요. 인구의 대부분이 아파트에 거주하는 우리나라에서 이미 세팅되어 있는 조명에 사람들이 백열전구를 끼워주길 기대하기는 사실 어려워요. 백열전구만이 주는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지 않기도 하고요. 결국 백열전구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조명을 직접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전구 회사에서 디자인 회사로 서서히 변해가는 것이 유일한 돌파구라고 판단한 거예요.
어떻게 보면 과감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선택을 따라 일광전구는 여기까지 왔어요. 많은 갈림길 사이에서 일광전구가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중심에 '인간'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전기와 화학 약품으로는 절대 구현할 수 없는 불빛만이 주는 가치를 믿은 거죠. 그러니까 에너지 효율이 더 중요해진 현대의 흐름에 ‘인간의 본능’이라는 응수를 둔 셈이에요. '불빛'이야 말로 전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막강한 기억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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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전구
돌멩이레터에서 이렇게 역사가 긴 브랜드를 소개하는 일은 흔치 않은데요.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현재와 꾸준히 소통하고 성장하는 브랜드들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바로 서두르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흔히 오래되고 낡은 것을 바꿀 땐 혁신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잊고 무조건 젊고 키치하게 만드는 거죠. 064 권순만 대표가 일광전구를 리브랜딩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멀리 봐야 한다는 거였어요. 당장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보다, 기본적인 것부터 차근차근 쌓아나가길 원했어요. 장난스럽지 않고 조금은 무겁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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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전구
그래서인지 일광전구의 전반적인 비주얼과 마케팅 방식을 보면 긴 역사의 진중함과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동시에 보여요. 제품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일광전구의 대표적인 스탠드 시리즈 '스노우맨'을 보면 섬세하게 가공된 스틸 스탠드와 유리구가 묵직한 안정감을 줘요. 둥글고 부드러운 눈사람 형태의 유리구는 수작업 블로잉 방식으로 제작해 자연스럽고 편안한 무게감을 더해주고요. 전구의 유리를 직접 생산하기도 했던 일광전구의 노하우가 느껴지는 부분이에요. 자체 개발한 둥근 구 형태의 디머 스위치(조명의 밝기를 조절하는 장치)에서도 기본에 대한 집착을 느낄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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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전구
고객에게 접근할 때도 일광전구는 멀리 내다보길 택했어요. 대형 유통 채널을 선점하는 것보다 젊은 세대에게 익숙한 브랜드와 협업하며 자연스럽게 다가갔어요. 일광전구가 첫 입점 문의를 한 곳은 그리 크지 않은 홍대 근처 편집숍 오브젝트인데요. 사물의 가치를 전달하고 현명한 소비를 돕는다는 오브젝트의 가치관과 맞닿아 팝업 전시까지 열게 되었고, 이 전시는 이후 많은 이들에게 입소문을 타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 외에도 일광전구는 다양한 야외 페스티벌이나 교보문고, 대림미술관, 부산 백제병원과 같이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아우디의 어반 컬쳐 스페이스나 삼성전자의 라이프스타일 팝업스토어에 콜라보레이터로 참여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에요. 브랜드를 세상에 강요하기보다, 브랜드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자연스럽게 계속 노출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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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전구
올해 10월 14일, 일광전구는 국내 유일의 백열전구 제조사란 타이틀을 내려놓고 남은 생산라인을 종료했어요. 전구 업체가 전 세계적으로 사라지는 추세라 자재 조달이 어려워진 탓에 내린 결정이라고 해요. 하지만 직접 생산만 중단할 뿐 백열전구를 지켰던 일광전구의 신념은 변하지 않습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에서 필요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이어 나가는 일은 일광전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우리가 전구 회사에서 조명 기구 회사로 전환하겠다는 방침과 맞물리면서 전구 생산은 중단하지만, 본질은 안 없앱니다. 일광전구만큼 다양한 전구류를 보유한 데가 없어요. 전구를 가장 잘 알고, 광원을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다양한 광원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회사라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 김홍도 대표 (북저널리즘 / 2022.12)
12월 29일 목요일,
2022년 마지막 돌멩이레터가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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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comment ✏️
한강 작가의 『희랍어 시간』에는 이런 구절이 있어요. "χαλεπὰ τὰ καλά. 칼레파 타 칼라.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세 번역이 모두 그르지 않은 것은, 고대 희랍인들에게 아름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아직 분절되지 않은 관념이었기 때문이다. 모국어에서 '빛'이 처음부터 밝음과 색채라는 두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오늘 레터를 쓰며 이 구절이 계속 떠올랐어요. 빛이라는 단어에 우리는 어떤 관념을 투영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빛이 필요하다고 우리말로 말하면, 다른 언어는 이 문장을 어떻게 번역할까 궁금하기도 했어요. 참고로 오늘 레터와 함께 추천한 곡은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의 OST인데요, 이런 가사로 사작해요. 'I need a light, just one familiar face' 2018년에서 1988년으로 내던져진 주인공에게 '빛'은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낯익은 얼굴을 뜻했던 것 같아요. 일광전구에게 '빛'은 영원한 것 없는 세상 속에서 브랜드가 따라가야 할 영원에 가장 가까운 가치였던 것 같고요. 요즘의 저에게 빛은 '위로'와 제일 비슷하답니다. 물결님에게 빛은 어떤 의미인가요?
🪨 오늘 돌멩이를 던진 이는 에디터 초록입니다.
오늘 돌멩이를 던진 이는 에디터 초록입니다. 공간과 텍스트를 좋아하고 이 둘의 힘을 믿으며 살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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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 away> 아직 만나보지 않으셨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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