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님, 우리는 오늘 많은 시간을 봤어요. 해가 있던 곳에 달이 자리하는 것, 점심을 돌멩이레터 37호 | 녹기 전에
자연스럽게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에 가까운
물결님, 우리는 오늘 많은 시간을 봤어요. 해가 있던 곳에 달이 자리하는 것,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는 것, 모래시계를 뒤집는 것, 계속해서 깜빡이는 노트북의 커서. 조금 전과 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는 건 시간을 보고 있는 것과 같아요. 특정 시각과 시각 사이. 잡을 순 없지만 때로는 눈으로, 때로는 귀로, 때로는 입으로 시간을 느낄 수 있어요. 오늘 소개해드릴 돌멩이는 이 '시간'을 '아이스크림'에서 찾았어요.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서 수제 아이스크림을 파는 '녹기 전에'의 이야기 들려드릴게요.
참! 지난 화요일 보내드린 <Blow away> 펀딩 오픈 레터 받아보셨나요? 물결님만을 위한 작은 선물과 우편함도 함께 안내드렸어요. 놓치신 물결님을 위해 관련한 내용을 본 레터 끝에 덧붙여둘게요. 돌멩이팀이 이런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에는 물결님이 있었어요. 감사의 마음 함께 전합니다.
- 초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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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기 전에
'녹기 전에'의 박정수 대표는 아이스크림, 가게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어요. 전기전자를 공부한 박정수 대표는 고등학교를 2년 만에, 대학교를 3년 만에 졸업한 후 대기업에서 일했죠. 그러던 어느 날, 직장의 시간의 흐름과 자신의 흐름이 맞지 않다고 느꼈어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가장 자신답게, 재밌게 쓰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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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기 전에
퇴사 후 박정수 대표는 아이스크림을 떠올렸어요. 단단하게 제 모습을 하던 아이스크림이 녹아버리는 것. 그 일련의 과정을 보는 건 박정수 대표에게 시간을 볼 수 있는 오브제임과 동시에, 대책 없이 시간이 흐르는 것을 경계할 수 있는 장치였죠. 물론, 아이스크림도 무척 좋아했어요. 하프 갤런 사이즈(1,237g)의 아이스크림 한 통을 금세 비울 정도로요. 2017년, 좋아하는 것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의 교차 지점인 '아이스크림' 가게를 종로구 익선동에 열면서 '녹기 전에'가 시작되었어요. 그 후, 2021년 지금의 염리동 매장으로 자리를 옮겼죠. 매장 앞, 간판 대신 걸려 있는 시계의 시간을 직접 갈아 끼우며 출퇴근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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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기 전에
"아이스크림을 먹는 게 아니라 보는 걸 좋아해요. 가만히 앉아서 뭔가를 지켜볼 때, 시간이 흐른다는 걸 알려주는 오브제가 시계랑 아이스크림이라고 생각했어요."
- 받정수 대표 (빅이슈코리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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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기 전에
지난 시간의 응답
녹기 전에의 메뉴는 매일 바뀌어요. 여름에는 복숭아, 가을에는 밤이 들어간 아이스크림이 나오기도 하고요. 손님들이 직접 보내오는 고수, 딜(허브), 오이, 당근 등의 재료를 이용해 만들기도 하죠. 박정수 대표가 처음 아이스크림을 만들면서 공부한 건 레시피가 아닌 재료였어요. 재료의 특성을 알기 위해 원서를 들여다봤죠. 우리가 얼음이나 물을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박정수 대표는 아이스크림을 낮은 온도의 분자들이 뭉쳐진 물질이라 생각했대요. 그가 아이스크림을 만들기 전, 배운 것들에서 온 거죠. 그래서 재료를 구성하는 분자들의 특성과 질감, 그 구성이 달라졌을 때의 결과 등을 공부하여 이를 아이스크림 제조에 대입했죠. 레몬즙을 만나면 층이 분리되는 우유를 잡기 위해 알코올을 날린 리퀴드를 쓴 아이스크림이나 깻잎, 게살 같은 조합이 그려지지 않는 재료를 맛있게 구현해낸 아이스크림 뒤에는, 박정수 대표가 그만둔 공부가 초석이 되어 주었어요. 그 결과 우리는 녹기 전에의 350개가 넘는 아이스크림을 만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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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기 전에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는 시간
박정수 대표가 아이스크림 가게를 선택한 다른 이유는 '겨울 방학'을 가질 수 있어서예요. 녹기 전에는 매년 겨울이 되면 겨울방학을 가져요. 처음에는 3달간, 지금은 한 달간을 쉬고 있어요. 물결님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이열치열과 이냉치냉 모두를 즐기는 저는, 겨울에 아이스크림 먹는 것을 좋아하지만요. 추위를 이기고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서기란, 여름에 아이스커피를 찾는 것 보다는 확실히 어려운 일이에요. 녹기 전에는 이 시간을 차라리 활용해요. 일 년 중 가장 추운 1월은 가게를 닫고 사고기(思考期)에 들어가요.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는 이 시간 동안 박정수 대표의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들이 스쳐 가요. 걷고, 책을 읽고, 목욕하고, 불멍을 하면서요. 외부의 소음을 차단한 채로요. 그리고 다시금 돌아오는 봄, 여름, 가을. 이 세 번의 시간 동안 생각한 것들을 열심히 꺼내놓죠. 열심히 고민한 것들이 녹아 없어져 버리기 전에요. 한 해 농사를 마친 땅이 휴식기를 가지듯, 잠시 웅크리는 시간을 통해 녹기 전에는 완전히 소진되지 않고 다시, 다시 에너지를 채워요. 마치 박정수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 한 컵을 팔지 않고 자신을 위해 남겨두는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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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기 전에
" 겨울은 구상의 시간이고 봄, 여름, 가을은 구현의 시간인 것이다. (...) 그런 의미에서
『녹기 전에』는 제품이 아니라 생각과 의식을 파는 곳이자 겨울에 스쳐 간 생각들이 발현되는 장(場)에 가깝다."
- 박정수 대표 (녹싸일기, 20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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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기 전에
매장의 재미
시간을 보여주는 녹기 전에는 손님의 시간도 어떻게 채울지 치열하게 고민해요. 박정수 대표의 한 인터뷰를 읽었어요. '재미'라는 단어가 총 7번 나오더라고요.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를 답하는 하나의 문단에서는 무려 4번의 재미를 언급했고요. 재미의 사전적 정의는 아기자기하게 즐거운 기분이나 느낌이에요. 녹기 전에가 전하고자 하는 재미도 이와 같죠. 먼저 매장에서의 재미에요. 수고스럽게 매장을 방문한 사람에게 그만큼의 무언가를 주어야 한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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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기 전에
꽤 오랜 시간을 머무르면서 대화를 나누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커피와 다르게, 디저트 역할을 하지만 아이스크림은 아직 하나의 제품으로 여겨져요. 그래서인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매장에 오래 머무는 건 좀 어색하게 느껴져요. 녹기 전에는 이를 바꿔나가고 싶어 해요. 그래서 매장 방명록을 만들어두고, 이를 아카이빙하고, 매장에서만 참여할 수 있는 대회를 열어요. 감정선 그리기 대회, 악필 대회, 5월이면 가정의 달을 맞아 이상형 그리기 사생대회 등 이벤트를 오픈하죠. 이 이벤트의 과정과 결과를 다시 SNS에 공유하면서 더 확산시키기도 하고요. 또 때로는 다코야끼나 빵, 커피와 함께하는 팝업을 열기도 해요. 이 모두는 손님의 시간을 '재미'로 채웁니다.
한 편, 디테일의 힘도 알고 있어요. 가게를 찾는 손님에게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고 '감사합니다'와 '고맙습니다' 사이에서 인사말을 고민하기도 하죠. 때로는 손님에게 반응하고, 피드백도 해요. 키오스크 주문을 어려워하는 손님을 위해 인간 키오스크를 설치하고요. 직원들에게 반말하는 무례함에 대해 직접 만든 안내판으로 응답하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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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기 전에
반응형 소통
소통은 온라인에서도 이어집니다. 어느 포털에서든 녹기 전에를 검색하면요 '녹무위키'라 불리는 나무위키가 떠요. 스크롤을 7번은 내려야 하는 분량이죠. 마치 게임 캐릭터 공략집 같은 빼곡한 메뉴들과 그날의 콘셉트에 맞게 메뉴를 꾸리는 'Before xxx day' 이벤트 메뉴, 그 간의 이벤트와 인터뷰 자료까지. 이 모두를 녹기 전에 팬들이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에 놀라웠어요. 또 놀라운 건, 그에 못지않은 녹기 전에 노션 페이지였어요. 녹기 전에는 공식 홈페이지 대신 이 페이지를 이용해 매일의 메뉴를 안내하고 있어요.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한 아담하고 유연한 공간'이라는 글이 맞이하는 이곳에서는 박정수 대표가 녹기 전에를 운영하며 느낀 생각, 고민을 볼 수 있어요. 매장 직원들의 대화가 손님에게 미치는 영향, 1달의 방학에 대한 소회, 1년여간 운영했던 녹밤(녹기 전에 밤)매장을 폐점하면서 남긴 이야기 등.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읽고, 매장을 간다면 한 손에 들린, 그 아이스크림 맛도 다르게 느껴질 거예요. 또 메신저 오픈채팅방(녹기 전에 주주총회), SNS에 방문 인증을 남기고 싶은 이들을 위한 템플릿, 핸드폰 배경 화면, 방명록을 오픈하고 있죠. 때로는 직접 찾아가요. 아이스크림을 주문해 준 손님 중 몇 명을 추첨하여 직접 배달을 갑니다. 팬들은 아이스크림을 먹기 전과, 먹으면서, 먹은 후에도 녹기 전에와 이어져 있죠. 이러한 모든 활동은 녹기 전에를 '반응형 매장'이라 부르는 증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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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기 전에
요즘 '항상성'이라는 단어에 대해 자주 생각해요. 화학 용어인 항상성은 '외부환경과 생물체내의 변화에 대응하여 체내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현상' 을 말해요. 조금 쉽게 얘기하자면 생물이 외부의 자극에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죠. 일상에 대입하자면 계속되어도 괜찮은 수준의 긴장과 바쁨, 여유, 권태쯤 될 것 같아요. 여기서 중요한 건 '균형'이에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거죠.
녹기 전에의 일기인 [녹싸일기]의 한 편에서도 이와 같은 글을 보았어요. 때는 11월 10일. 바로 광고의 날 쯤이었죠. 평소 별도의 광고를 하지 않던 녹기 전에 였지만 한 광고를 보고 마음이 동해 광고를 해보기로 해요. 그리곤 광고에 쓸 이미지를 고민했어요. 녹기 전에의 무엇을 말해야 하나. 답은 녹기 전인 아닌, 녹아 버린 아이스크림에서였어요. 아이스크림이 녹기 전에, 이 시간이 가버리기 전에 꽉 잡으라고 하는 얘기들이 또 하나의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있어요. 때로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겨울방학도 필요해요. 그럼에도 물결님의 시간은 다시 찾아올 거예요. 녹기 전에를 둘러보며 가장 와 닿은 [녹싸일기]의 문장으로 오늘의 인사 대신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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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기 전에
"어쩌면 우리 인생은 실온이라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든 형태를 유지하려는 아이스크림보다 자연스럽게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에 가깝지 않을까. 녹아버린 아이스크림도 사실은 달콤하다는 것을 망각한 채 살지만 말이다."
-박정수 대표(녹싸일기, 2020.11.18.)
12월 22일 목요일,
돌멩이레터 38호가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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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comment ✏️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핸드폰에 강풍과 한파주의보를 안내하는 재난 문자가 울리고 있어요. 창밖으로는, 여름 내내 온전한 모양을 한 채 그늘을 만들던 플라타너스 잎이 부피를 잃고 날아다니고 있고요. 이 차가운 계절에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먹는다는 건 뭘까 하는 질문이 떠올라요. 어릴 때, 명동에 자주 놀러 갔는데요. 한때 유행이었던 아이스크림이 있었어요. 30cm쯤 되는 아주 긴 소프트 아이스크림이었고, 저는 명동에 갈 때마다 사 먹었어요. 한 번은 손에 한기가 느껴지는 날. 어김없이 그곳을 들러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요. 맛은 기억이 안 나지만, 맛있게 먹었던 기분은 기억이 나요. 왜 그런지 생각해보니 아마도 겨울을 만끽해서였던 것 같아요. 겨울에 아이스크림을 먹는 건, 올해도 겨울이 왔다는 것을 느끼는 저만의 방식이었던 거죠. 궁금해요. 물결님은 언제 올해의 겨울을 느꼈는지요.
🪨 오늘 돌멩이를 던진 이는 에디터 초이입니다.
사람과 브랜드를 좋아해요. 매력적인 브랜드 뒤에는 늘 매력적인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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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 away> 아직 만나보지 않으셨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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