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부터 매 계절 하는 일이 있어요. 물결님도 자주 마주칠 것 같아요. 길을 걷다 보면 돌멩이레터 35호 | 물나무사진관
베껴내며 생겨나는
2년 전부터 매 계절 하는 일이 있어요. 물결님도 자주 마주칠 것 같아요. 길을 걷다 보면 몇 블록마다 있는, 즉석 사진을 찍는 곳이요. 2년 전, 친구와 간 카페 안에 즉석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부스가 하나 있었어요. 기대하고 찍은 사진은 아니었는데요. 그 시기를 기억할 만한 이벤트가 있어서 그랬는지, 단색의 배경에 단정히 찍힌 사진이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그 친구와 계절마다 즉석 사진을 찍기로 했죠.
올해 가을은 서울 종로구 서촌의 한 부스에서 찍었어요. 지정된 시간 안에 찍힌 여러 컷의 사진 중, 선택의 기준은 나름 명확해요. 가장 자연스럽거나 가장 보기 어려운 모습. 그 두 가지가 가장 저를 닮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시간이 갈수록 사진을 고르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어요. 어쩌면, 직관적으로 자기다운 모습을 알 수 있는 능력이 내재해 있나 봐요. 오늘 소개해 드릴 정통 흑백사진관 ‘물나무사진관'도 그런 사진을 찍어요. 가장 피사체다운 사진을 위해 있는 그대로 베껴내죠. 사:베낄 사, 진:참 진. '사진'을 찍는 물나무에 대해 이야기해드릴게요.
- 초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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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나무사진관
초상화를 그리는 조선시대만의 원칙이 있었어요. 하나는 '이호불사 편시타인.' 풀이하자면, 터럭(털) 한 올이라도 다르게 그리면 그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쉽게 말하면 극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죠. 다른 하나는 '전신사조'에요. 그림은 인물의 외형만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정신까지 담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이 두 가지 원칙은 '물나무사진관'이 만들어내는 사진의 방향과도 동일해요. 물나무사진관의 김현식 대표는 주관에 따라 앵글을 만들어내지 않고, 정면을 응시한 채 온전히 인물의 있는 그대로를 베껴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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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나무사진관
물나무사진관의 김현식 대표가 이러한 사진을 찍게 된 데에는 '가장 한국적인 사진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있었어요. 김현식 대표가 한 월간 매체에서 일했을 때예요. '수카라'라는, 일본에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책에 삽입될 사진을 맡았는데요. 그중 한 가지 소재가 '비빔밥'이었죠. 우리는 보통 비빔밥을 생각하면 밥공기에 여러 나물과 계란이 올려진 사진을 떠올리잖아요. 그런데 비빔밥을 촬영한 여러 컷의 사진 중 최종 선택된 사진도 이와 비슷했다고 해요. 오랜 시간 비빔밥을 하나의 문화로 여겨 온 우리의 관점과 일본인의 관점이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죠. 김현식 대표는 여기서 질문하고, 집중했어요. '우리가 익숙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것을 깊게 들여다보지 않는구나.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었는지 알 수 없겠다.'라고요. 물나무사진관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어요. '본질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을 한국적인 사진'이라 정의하고 이를 구현하기로 결심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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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나무사진관
흑과 백
김현식 대표가 한국적인 사진을 찍기 위해 가장 먼저 결정한 건 흑백사진이에요. 인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되 인물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불필요한 요소를 모두 가려야 했죠. 당시 이미 단종된 후지 흑백필름을 구하기 위해 무척 애썼다고요. 또 한국적인 사진을 강화하기 위해 예전 촬영 방식을 그대로 가져왔어요. 아날로그 방식으로 흑백사진을 찍는 건 꽤 많은 시간과 복잡한 과정이 있어야 해요. 필름을 따로 준비해야 하고, 필름을 넣고 렌즈의 초점과 설정을 맞추고 신중히 촬영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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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나무사진관
촬영을 마치고 나면 암실에서 16단계의 인화 작업을 거치는데요. 빛을 노출하는 시간과 방법에 따라 흑과 백의 대비가 달라지기 때문에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어요. 도중에 작은 먼지라도 들어가면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해야 하거든요. 또 원하는 만큼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와 달리 아날로그 카메라는 찍을 수 있는 컷이 한정되어 있어요. 원판 필름당 단 한 컷밖에 찍지 못하죠. 그렇기에 가장 그 사람다운 모습을 포착했을 때라야, 셔터를 누를 수 있어요.
" 아날로그는 찍는 사람과의 호흡이 중요해요. 긴장된 상태에서 호흡을 맞추고 찍어야 하기 때문에 힘든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런 과정을 사진에 담아내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 한 장의 사진 안에 훨씬 더 커다란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김현식 대표 (톱클래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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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나무사진관
배어나는 한지
두 번째로 고민한 건 인화지에요. 아날로그 방식으로 촬영한 흑백사진을 일반 인화지에 출력하고 싶지 않았죠. 그렇게 찾은 방법이 한지였어요. 물나무사진관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화진인데요. '한지에 인화한 사진'을 말하죠. 한지는 그 자체로도 보존력이 뛰어나요. 물나무사진관은 여기에 작업을 더해요. 국산 닥나무를 5겹으로 압착해 만든 한지에 사진을 인화하고 그 위에 옻칠을 더해요. 이는 한지의 보존력을 강화하기 위함인데요. 거의 반영구적으로 사진을 보존할 수 있을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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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나무사진관
물나무사진관이 한지를 사용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한지의 '반투명성' 때문이에요. 초상화에는 '배채법'이라는 채색법이 있는데요. 바로 종이의 뒷 면에 채색을 깊게 해서 앞면으로 색이 올라오게 하는 기법이에요. 그리곤 앞쪽에서는 다시 그 윤곽을 잡아주죠. 이 채색법은 더욱더 자연스러운 색감을 만들어줘요. 한지는 이와 같은 기법을 적용하기에 뛰어나요. 반대 면이 막혀 있는 일반 종이와 다르게 한지는 앞면과 뒷면을 자유롭게 넘나들어요. 빛에 한지를 비추면 빛이 통과되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그 결과 한지에 인화된 사진은 앞면에도, 뒷면에도 이야기를 남겨요. 쨍하게 한 번에 표현되는 사진과 다르게 천천히, 인물이 배어나는 화진은 물나무사진관만의 독특한 색감을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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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가까운 사진
물결님도 가끔 그럴 때 있지 않나요? 길을 걷다가, 카페에서 친구와 이야기하다, 출장을 마치고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무심코 유리에 비친 물결님의 얼굴을 봤는데 낯선 느낌이 들 때요. 내가 이런 표정이 있었나? 나, 요즘 이런 얼굴인가 싶을 때요. 그럴 땐 잠시 그 얼굴을 감상해보곤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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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나무사진관
물나무사진관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게 된 것도 이런 시간을 통해서였어요. 2015년부터 시작한 '자화상 프로젝트'인데요.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싶어요.
어느 한 날은 20대 여성이 사진관을 찾았다고 해요. 다른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이리저리 자세를 고쳐가며 사진을 찍다가 몇 컷쯤이었을까요. 울음을 터뜨렸다고 해요. 알고 보니 영정사진을 찍으러 온 것이라고요. 타인에게 남겨질 자기 모습을 선택하던 그 손님을 보며 김현식 대표는 생각했대요. '누군가의 인생을 대변할 사진을 내가 고를 수 있는 걸까'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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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나무사진관
" 20대의 한 여성은 병원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고 영정 사진을 찍기 위해 스튜디오를 찾아왔어요.
사진을 몇 번씩 고쳐 찍고 직접 고르는 과정을 거쳤죠. 타인이 오랫동안 기억해줄 모습을 직접 찾아나간 셈이죠."
- 김현식 대표 (톱클래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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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나무사진관
자화상 프로젝트는 이를 계기로 시작되었어요. 물나무사진관의 2층, 하얀색 천 앞에 서서 카메라를 마주해요. 턱을 조금 더 당겨보라거나 여기를 보라는 사진가는 없어요. 오로지 홀로 카메라 렌즈를 마주하다, 가장 나다운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카메라 셔터와 연결된 버튼을 눌러요. 그러면 당장 메신저의 프로필을 하고 싶은 사진은 아닐 수 있지만 이상하게, 이따금, 한 번씩 들여다보게 되는 자화상이 완성돼요. 온전한 나에 가까운 가장 물나무사진관다운 사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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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서의 사진
있는 그대로를 담는 물나무의 사진은 공간으로 이어져요. 물나무사진관이 위치한 종로구 계동 골목길에 가면, 한 풍경을 만날 수 있어요. 돌로 된 바닥을 끼고 있는, 낮은 상점들의 외벽에 커다란 인물 사진들이 걸려 있는데요. 모두 물나무사진관의 '정박의 기억 | 2018 계동' 작품이에요. 가게 주인들의 사진이죠. 계동에는, 길게는 50년까지 한 자리를 오래 지키고 있는 상점들이 많아요. 결혼과 함께 정착하여 시작한 세탁소, 부모님께 물려받은 부동산, 몇십 년 째 사람들로 북적이는 분식집. 계동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은 변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 이 변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사진에 담아낸 거죠. 계동에 자주 가는 저는 이 사진들이 보이면 이제 계동이구나, 사진이 더 이상 보이지 않으면 이제 계동이 끝났구나 해요. 제게는 이 사진들이 계동을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해주기도 하죠. 물나무사진관의 공간과 시간의 초상을 담는 작업은 2019년 전북 군산과 2021년 북촌으로 이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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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나무사진관
기념일마다 물나무사진관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일종의 의식처럼 하기도 하고요. 1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번갈아보면서 안도하기도, 반성하기도 하죠. 물나무사진관에게 사진은 찰나가 아닌 그 이상을 담는 그릇이에요. 우리가 지금 찍는 사진은 필연적으로 미래에 내가 보게 돼요. 그러니 지금의 렌즈에는 미래의 내가 나를 보고 있죠. 지금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찍지만 카메라 앞에 선다는 것은 어쩌면, 사진 앞의 나를 돌보는 일인 것 같아요.
11월 3일 목요일,
돌멩이레터가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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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comment ✏️
사진을 볼 때 항상 하는 말이 있는 것 같아요. '이때 재밌었는데' '이때 갑자기 기분 좋아져서 막 난리였잖아' '이때 진짜 힘들 때였어.' 사람이 가진 기억의 용량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잊고 있었다고 생각한 것도 사진을 보면 떠올라요.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 남는 건 사진뿐이야 라고 하나 봐요. 글을 쓰다가 핸드폰 속 사진첩을 열어봤어요. 근래에 특별한 장소를 간 기억이 없어서, 요즘 무슨 사진을 찍었지? 하고요. 앨범을 열자, 이런 생각이 무색하게 제 사진이 많더라고요. 그래도 틈틈이 저 자신을 챙기고 있는 것 같아 안도감이 들었어요. 이때도, 지금도. 무탈하게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구나 하고요. 물결님의 사진첩은 어떤가요. 그 때의 물결님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요. 오늘 앨범에 사진 하나를 추가해봐요. 미래의 물결님이 반겨줄거예요.
🪨 오늘 돌멩이를 던진 이는 에디터 초이입니다.
사람과 브랜드를 좋아해요. 매력적인 브랜드 뒤에는 늘 매력적인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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