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님 '낯설게 보기'에 관해 들어보셨어요? 친숙한 대상을 낯선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고 이전과 다름을 찾아내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가 제안하는 '낯설게 하기' 7가지 기법 중 첫 번째는 바로 '고립'이에요. 사물을 원래 있는 모양에서 떼어내고 엉뚱한 곳에 둠으로써 새로운 자극을 찾는 방법이죠.
저는가끔느슨해진 저 자신을 다시 바라보고 싶을때이방법을사용해요. 익숙했던환경에서저를떼어내고낯선곳에둠으로써내안의새로움과 가능성을 찾아보려 하죠. 만약 물결님에게도 지금 그 과정이 필요하다면 오늘 이야기에 집중해보세요. 오늘소개하는업사이클링패션브랜드 '래코드(RE;CODE)'가 그 방법을 안내해줄 거예요.
물결님 혹시 리사이클링(Recycling)과 업사이클링(Upcycling)의 차이를 알고 계시나요? 먼저 리사이클링은 버려지거나 쓸모를 잃은 제품을 재처리 혹은 다시 고치는 작업을 거쳐 재활용하는 것을 의미해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치와 스토리, 디자인 변형 등을 가미해 새로운 완제품으로 재탄생 시키는 활동이 바로 업사이클링이고요. 쉽게 말해 업사이클링은 재활용에 의미를 부여해 새로운 가치를 지닌 오브제로 만드는 활동이에요.
오늘 소개하는 브랜드 '래코드(RE;CODE)'는 바로 이 업사이클링을 기반으로 하는 패션 브랜드에요. 환경에 대한 패션 기업의 책임 의식으로부터 출발해 올해로 10년 째 굳건하게 그 진정성을 지켜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의류 기업은 오랜 시간 쌓인 재고를 처리하기 위해 매립 또는 소각의 방식을 활용해요. 하지만 소위 패스트패션(fast fashion)이라 불리는 SPA브랜드가 인기를 끌고, 폐기되는 의류의 양도 매년 늘어나면서 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기와 토양 오염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죠. 그에 발맞춰 국내 패션업계에서도 ESG 경영, 지속가능성, 친환경 바람이 불고 있긴 하지만 오래되지는 않은 상황이에요.
래코드는 그런 국내 패션 업계 내에서 무려 10년 전인 2012년에 국내 대기업 최초로 런칭한 업사이클링 브랜드예요. 래코드를 만든 코오롱 인더스트리는 당시 20개 정도의 패션 브랜드를 가지고 있었어요. 사실 의류 회사가 재고를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질 좋은 제품을 적절한 양만 만들어 판매하는 것이에요.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남는 제품을 두고서 코오롱은 어떻게 하면 패션 기업으로서 버려지는 옷들을 가장 잘 살려낼 수 있을지 고민했죠.
그래서 관련 문제에 관심이 있던 다양한 디자이너들과 각 분야의 장인들을 모아요. 이들과 함께 재고 의류를 두고 논의하고 서로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덧붙이면서 지속가능한 패션 브랜드 래코드를 만들었어요.
물결님 빈티지 마켓 가보셨어요? 열심히 둘러보다 보면 오래되어도 여전히 좋은 품질을 유지하고 있는 의류나 물건을 찾아볼 수 있어요. 그런 친구들은 유행을 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싼 값을 주고 사도 오래 간직할 수 있어 전혀 아깝지 않죠. 래코드가 추구하는 패션은 바로 그런 거예요. 친환경의 본질을 담았을 뿐 아니라 수년이 지나도 계속해서 간직되는 제품이요. 그래서 업사이클링하는 과정 중에 친환경이라는 가치에만 매몰되지 않으려 노력해요. 오히려 더욱 과감한 디자인을 시도하고 래코드만의 방법으로 친환경을 실천하고자 다양한 실험을 거듭해요.
경기도 안양에는 코오롱 인더스트리 브랜드들의 시즌 오프 상품이 모두 모이는 상설 할인 매장이 있어요. 여기엔 코오롱의 재고 의류뿐만 아니라 에어백, 자동차 시트 같은 공업 용품까지 래코드 제품의 소재가 되는 모든 재료가 모여 있어요. 그리고 이 건물 7층에 래코드의 모든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 '래코드 아틀리에(RE;CORD ATELIER)'가 있습니다.
래코드의 디자이너들은 컬렉션을 구상하고 디자인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제품 스케치부터 먼저 하지 않아요. 업사이클링의 특성상 제한된 재료로 제품을 만드는 만큼 원재의 중요성이 더욱 크기 때문이죠. 그래서 디자이너들은 먼저 이곳 아울렛에 방문해 사용할 수 있는 재고부터 직접 선별해요. 보통 2-3년 이상 판매되지 않은 재고를 주 원재로 활용하는데요. 디자이너들에게는 과거의 트렌드를 현재의 트렌드에 맞게 재해석해야 하는 미션이 주어지는 셈이죠.
래코드만의 고집 래코드의 디자이너들 사이에는 최대한 지키자고 한 가지 약속한 것이 있어요. 바로 원 재고를 뽑은 사람이 끝까지 그 원 재고를 책임진다는 거예요.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 옷을 만들고 남은 원 재고로 가방이나 쿠션 등의 액세서리를 만들기도 하죠. 이렇게 재료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더라도 결국 소각해야 하는 순간이 오는데요. 10년간 소각한 원단은 약 25장 정도래요. 원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 진심이 느껴져요.
래코드의 제품을 살펴보면 한쪽에 독특한 숫자 패치가 붙어있어요. 이 숫자로 같은 디자인의 옷이 세상에 몇 벌 있는지 알려주고 있죠. 'Only'라는 단어가 적힌 작은 숫자 패치일 뿐인데 그 옷이 갖는 의미를 극대화시켜요. 이게 바로 리폼 의류가 갖는 매력이에요. 나만의 무언가를 갖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특별한 일이거든요.
래코드는 물결님에게 특별한 존재가 될 제품을 만들길 원해요. 물결님과 이야기를 공유하고 감정을 나눈 사람이 그만큼 소중한 의미를 갖듯, 옷이라는 존재도 그런 역할이 되기를 바라죠. 장기적인 관점에서 옷과 관계를 맺듯 소비하는 색다른 경험을 시작해보라고 말이에요.
영감은 온전한 해체로부터
자유롭게 원단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창고에 걸려 있는 재고 상품들을 재구성해 디자인하다 보니 제품이 완성되기까지 디자이너의 개성과 역량이 큰 역할을 해요. 여기서 중요한 건 기존의 상품을 섬세하게 잘 해체하는 작업이에요. 온전하게 해체된 각 소재를 섬세하게 관찰하고 파악함으로써 새로운 조합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거든요.
Upcycling Bag Series에서 래코드의 디자인 프로세스를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스포츠 점퍼 한 벌을 몸판과 소매, 그리고 후드로 각 부분을 나누어 서로 다른 디자이너가 맡아 세 개의 가방으로 만든 건데요. 래코드의 실험적인 아이디어가 잘 드러나요.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각 디자이너의 개성과 특성이 담긴 서로 다른 디자인을 보는 재미도 주죠.
물결님 '아방가르드하다'는 말 들어보셨어요?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프랑스어로 '최전방 부대, 앞선 부대'라는 뜻을 가져요. 18-19세기 프랑스 전쟁 역사 속에서 최전방에 선 이들을 지칭하죠. 이러한 의미가 이어져 최전선의 새로움과 파격적인 예술 사상을 두고 아방가르드라고 칭했어요.
아방가르드는 해체주의와도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요. 기존의 의복이 갖던 질서와 관습을 깨고 원단을 해체한 후 덧붙이거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만들어내는 거예요. 래코드의 디자인 정수도 바로 이 아방가르드에 있어요. 재고를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과정에서 디자이너와 장인의 상상력이 무한히 펼쳐지고 이는 하나의 새로운 창의적 예술로 이어져요.
전혀 다른 두 가지 소재를 섞거나, 재킷을 바지로 또는 바지를 재킷으로 만들어내는 역발상적 시도에도 과감해요. 위 제품처럼 남성 재고 수트 블레이저를 해체해 스커트의 플리츠로 패치하기도 했어요. 아 참, 물결님 래코드의 모든 제품에는 각 제품이 본래 어떤 제품에서 탄생하게 됐는지 그 역사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니 살펴보는 재미도 놓치지 마세요.
래코드 컬렉션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과 단추, 지퍼 등의 부자재도 허투루 버리지 않았어요. 래코드는 2016년, 조금 더 온전한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는 리나노(RE;NANO) 라인을 선보였는데요. 리나노 제품들은 베이직한 디자인의 의류에 잉여 원단과 부자재를 새롭게 조합해 탄생해요. 대표적인 제품은 에코백 티셔인데요. 최근 들어 마케팅 수단으로 쉽게 만들어지고 버려지는 에코백을 모아 새로운 쓰임새를 줬어요. 똑같은 디자인이 하나도 없어서 물결님만의 제품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요.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 래코드는 의류 외에 액세서리 제품이나 인테리어 소품 등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어요. 그 덕에 업사이클링 콜라보를 진행함에 있어 한계가 없죠. 2020년부터는 다양한 글로벌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래코드의 업사이클링 정신과 리디자인 노하우를 알리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RE;CODE by NIKE 나이키와의 프로젝트는 지속가능성에 대한 래코드와 나이키의 공감으로부터 시작됐어요. 래코드 디자이너들은 경기도 이천에 있는 나이키 물류센터를 직접 찾아가 재고를 살폈죠. 이후 전달받은 재고품에 코오롱이 가지고 있던 재고 의류와 원단을 추가해 새로운 형태의 의류와 액세서리로 만들어요. 스포츠 브라탑은 가방으로, 남성 셔츠는 아동 점프 수트로, 또 가방은 베스트로 말이죠. 버려질 뻔했던 제품들이 래코드를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펼치게 된 거예요.
제품 출시 외에 나이키 제품을 활용한 업사이클링 워크숍도 진행됐어요. 잘 입지 않는 스웨트 셔츠를 새로운 아이템으로 변신시키는 업사이클링 노하우를 전수하고, 버려진 운동화 인솔로 실내 슬리퍼를 만들어보며 많은 이들에게 업사이클링의 매력을 직접 전하는 기회가 됐죠.
Make the Unique Piece with Our Memory 물결님 혹시 작년 9월에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6회 유엔총회 기억하세요? 방탄소년단이 연사로 초청되어 유독 기억에 남아요. 그때 방탄소년단(BTS)이 입고 나왔던 정장이 바로 래코드의 작품이에요. 이 만남을 바탕으로 래코드는 HYBE INSIGHT와 함께 지속 가능에 대한 글로벌의 관심을 이끄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방탄소년단이 활동할 때 직접 착용했던 의류와 염색하지 않은 에어백 자재를 활용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피스 패치 가방을 만들었죠. 지속 가능에 대한 공감과 유대를 바탕으로 동행하는 것, 그것이 래코드가 지속가능을 말하는 방법이에요.
" 업사이클링에 한계를 두지 않는 것이 래코드의 브랜드 철학이에요. 다양한 분야에서 예상치 못한 업사이클링 패션을 마주했을 때의 신선함을 제안하기 위한 것이죠. "
래코드가 매력적인 또 다른 이유는 물결님이 원할 때 언제든 래코드의 서사를 따라갈 수 있도록 꾸준히 걸음을 기록해왔다는 거예요. 블로그뿐만 아니라 이미 3권의 책도 출간했죠. 한국 패션사에서 앞장서 업사이클링 브랜드를 시작한 래코드의 자부심이 느껴져요. 그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에 대한 논의가 다음 세대로 이어졌을 때 이 기록들이 길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어요.
래코드는 마치 이야기꾼 같아요. 버려지는 옷에 다시 쓰임을 불어넣고, 그 과정에서 의미를 찾아주고 때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기도 하죠. 이런 스토리를 가진 브랜드는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을 단단하게 이끌고 연결하는 힘을 가져요. 매출이 많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도 이를 지속한다는 건 그만큼 지속가능을 실천하는 일에 강인한 의지와 진심을 담고 있다는 뜻이죠.
래코드는 지금도 물결님의 소비가 '옷을 산다'는 의미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너머의 가치를 갖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든, 다시 바라보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
10월 13일 목요일,
돌멩이레터 33호가 발행됩니다.
Editor's comment ✏️
혹시 물결님에게도 추억이 담긴 세상에 하나 뿐인 소중한 무언가가 있나요? 저는 제 몸에 맞게 새로 리폼한 스웨터 한벌이 있어요. 어느 명절 날 할머니께서 "이거 좋은 옷인데, 너 가져가 입을래?"하며 옷장에서 꺼내 주셨죠. 처음엔 너무 커서 못입으려나 했는데 찬찬히 살펴보니 동그란 금장 단추도, 길게 잡힌 손목 주름도 너무 마음에 들더라고요. 그래서 포인트가 모인 상단은 남겨두고 아래쪽을 잘라낸 후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나만의 스웨터로 만들었어요. 사랑하고 존경하는 할머니의 시간이 나에게로 이어지는 것만 같아서 좋더라고요.
요즘은 자꾸만 쓸모를 잃어가는 것들에 눈길이 가요. 물결님 주변에도 그런 친구가 있는 지 한번 살펴보세요. 어쩌면 애타게 눈길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 오늘 돌멩이를 던진 이는 에디터 모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건강한 마음에 새기는 좋은 이야기로 세상을 더 따뜻하게 만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