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 0교시가 있었어요. 제가 다닌 학교에서는 0교시 시작 전 명상의 시간을 가졌는데요. 잠이 덜 돌멩이레터 23호 | 풍월당
다시 만난 세계
제가 다닌 고등학교에는 0교시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 0교시가 시작되기 전 항상 명상의 시간을 가졌죠. 잠이 덜 깬 몽롱한 상태로 눈을 감으면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매일 같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명상이 시작되었어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몇 멜로디들은 여전히 기억이 나요. 그 멜로디들은 0교시 명상의 시간뿐 아니라, 살면서 집중이 필요한 순간 종종 제 귀에 나타나 주곤 했죠. 오늘은 이 멜로디의 세계에 빠져 19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클래식 전문 음반 가게 ‘풍월당’을 소개해드릴게요. 클래식과 오페라를 무척 사랑하는 한 정신과 의사에 의해 시작되었답니다.
물결님, 돌멩이레터는 어느덧 23번째 돌멩이를 던져드려요. 첫 번째 돌멩이를 던져드린 때로부터 벌써 세 번째 계절을 맞이해요. 돌멩이팀은 궁금해요. 물결님이 돌멩이레터를 어떻게 읽고 있는지, 아쉽다고 생각하는 점은 없는지. 물결님의 의견으로 뒤를 둘러보고 더 멀리 나가기 위해 방향을 다듬어 보려 해요. 오늘 레터를 읽은 후 <돌멩이레터 만족도 조사>에 의견 들려줄 수 있을까요? 작은 선물도 준비했으니 함께 열어보시고요!
- 초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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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론
풍월당의 시작
풍월.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비추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는 풍월당은 서울 압구정 로데오의 한 자리를 지키고 있어요. 짙은 초콜릿 색의 가구들에 4만 여장이 넘는 클래식 음반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요. 한쪽으로는 박종호 대표가 직접 쓰거나 풍월당에서 펴낸 책들이 진열되어 있어요. 음악과 관련된 것부터 문학, 글쓰기에 관한 책 등 예술로 묶일 수 있는 주제들을 다룬 책들이죠. 옆으로는 구매한 책을 읽거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 ‘로젠 카발리에'가 있어요. 고풍스러운 무드가 느껴지는 이곳은 1900년대 날카로운 비평이 오가던 오스트리아의 한 카페를 모티프로 했어요. 구경하며 서성이고 있으면, 매장 내 전문 큐레이터분이 음반을 추천해주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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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에서 마차를 타면 새로운 세계로 이동하듯, 문을 열면 새로운 세계로 들어선 느낌을 주는 이곳은 2003년, 정신과 의사였던 박종호 대표가 열었어요. 중학생 때 우연히 75장의 LP로 구성된 '세계 명곡 대전집'을 들은 후로 이 세계를 사랑하게 되었죠. 음반을 하나씩 사 모으며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어요. 그렇게 의학서적을 들고 의대에 입학하고, 수련의를 거쳐 흰 가운을 입기까지 박종호 대표의 한쪽에는 언제나 클래식 음악이 함께 했죠. 특히 오페라를 좋아해서 직접 해외의 공연장을 찾아다녔는데요. 그 회수가 천 번이 넘죠. 한 번은 여느 날처럼, 여행길에 지인들이 부탁한 음반을 사서 귀국하는데 문득 서울에 제대로 된 클래식 음반을 살 수 있는 곳이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아요. 그리곤 '이러다 음반을 살 곳이 모두 없어지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에 바로 풍월당을 시작했어요. '레코드 가게'라는 작은 간판을 걸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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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월당
학문으로서의 음악
풍월당을 열고 10년간은 적자였어요. 그렇지만 그 동안 풍월당의 세계는 더욱 견고해져 갔죠. 더욱 클래식 음악에 다다르는 방법으로요. 풍월당은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을 그저 좋은 배경음악으로, 좋은 몇 멜로디로만 기억하는 것을 안타까워했어요. 바르게, 제대로 클래식 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시작된 게 ‘풍월당 아카데미'에요. 매주 다른 주제로 클래식이나 오페라를 감상하고, 고전을 함께 읽는 프로그램이었는데요. 매주 읽고 고전 한 권을 읽어 내야 하고, 한 번에 세 시간씩 진행되는 쉽지 않은 강의였어요. 그럼에도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재수강률도 높았죠. 그건 아마도 풍월당이 '클래식 음악'에 가지고 있는 정의 때문일 거예요.
풍월당에게 '클래식 음악'은 그냥 음악보다는 '예술'에 가까운 의미를 지녀요. 음악이 단순히 음계와 선율만을 지닌 건 아니에요. 모든 음악은 음악이 만들어졌을 때의 정신, 가치관, 시대 상황 등 당대의 모든 것을 담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멜로디와 선율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선으로 다양한 면을 들여다봐야 그 음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극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오페라의 경우는 더 그렇고요. 이것이 클래식 음악을 얘기하면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시인 파블로 네루다,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과 백만장자 사업가였던 피에르 베르제의 50년 동성 연애사를 다루는 이유입니다. 이렇듯 풍월당의 아카데미에서는 음악을 감상하기도 하지만 시대 상황, 의식주의 형태, 역사적 사실 등을 함께 배워요. 현재는 나성인 음악칼럼니스트, 김문경 음악 해설가 등 전문가들과 함께 피아노 강의에서 지휘자, 화가, 신화, 문학 이야기까지. 예술이라 불릴 수 있는 틀 안에서 매월 하나의 주제로 강의가 열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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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월당
음악의 아카이빙
한 편으로는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자료를 풍부히 하는 작업에 집중해요. 음반 수입상에게 음반을 추천받아 국내에 들이기도 하고요, 많이 취급되지 않던 음반사의 음반들을 더 들여오기도 했어요. 생산이 중단되어 만날 수 없던 음반을 풍월당이 다시 살려내기도 했죠. 매주 명반 백서라는 콘텐츠를 통해 숨겨진 명반을 소개해주기도 합니다.
2017년부터는 책을 펴내기 시작해요. 첫 책은 오페라를 무척 아꼈던 박종호 대표가 직접 해설을 붙인 오페라 [아이다] 대본집이었어요. 사실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오페라 대본집이 출판된 적이 거의 없었거든요. 공연장에서 나눠주는 대본집도 번역 상태가 좋지 않았고요. 이에 ‘아무도 안 하면 우리라도 해야겠다' 는 마음으로 팔을 걷어붙인 것이 풍월당 출판의 시작이에요. 이후 음악가에 대한 비평을 담은 [브람스 평전], [슈만 평전]을 펴내고요. 번역에만 2년이 걸린 840쪽의 음악 이론서 [고전적 양식] 등을 출판했어요. 박종호 대표가 음악과 관련해 직접 쓴 책만 해도 10권이 넘죠. 풍월당의 이러한 행보는 사실 대중성이나 수익성을 생각한다면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럼에도 계속 이러한 활동을 하는 건 풍월당에게 음악은 잃어버렸던 세상과의 또 하나의 연결점이기 때문이에요. 이에 대한 박종호 대표의 인터뷰가 인상 깊어요.
" 언제 어디서든 예술은 우리 곁에 늘 있어야 한다. 풍월당이 널리 알려지는 건 관심 없다.
제대로 예술을 탐닉할 수 있는 곳이 한국에 한 곳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
(20.11.12. 한경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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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감상의 확장
음반을 파는 곳답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 풍월당에는 구름채라는 음악 감상실이 있는데요. 항상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준비된 이 공간은 탁월한 음질을 자랑해요. 함께 영상을 감상할 수 있는 대형 스크린도 설치되어 있죠. 이 공간에서는 주로 연주나자 음악가의 쇼케이스가 열리는데요. 물결님도 들어봤을 백건우, 손열음 피아니스트에서부터 첼리스트 율리우스 베르거, 세계적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 등이 이 공간을 찾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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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월당의 모든 것은 고객들이 운영하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대표님의 뜻을 따라 예술가의 마음으로 음악악을 취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게 된 곳이에요. 그렇기에 이곳에서는 클래식 음악 문화가 제대로 뿌리 내기리 위한 '진짜'를 보여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21.11.9. 월간 음악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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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월당
세상을 이해하는 소재로써의 음악
물결님, 풍월당을 처음 접했을 때 말이에요. 정신과 의사가 클래식 음반가게를 열었다니, 얼핏 들으면 '왜?'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어째서인지 저는 무척 이해가 갔어요. 정신과 의사와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해하고 싶은 건 결국 동일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바로 사람에 대한 이해예요. 사람을 관찰하고 이해하려는 것에서 출발하는 정신 의학과, 악상 속에 자신을 투영하는 음악가. 그렇기에 정신과 의사로서 진찰을 하고, 음악을 감상하는 두 행위는 결국에는 사람을 이해하고 나서야 완성되는 것이죠. 풍월당은 사람에 대한 이해 없이 음악을 온전히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해요. 반 고흐의 일생을 모르고 그의 자화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조국인 이탈리아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담아내려 했던 베르디의 정신을 모르고는 그의 음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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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월당
풍월당의 이러한 시선은 세상으로까지 이어져요. 풍월당에게 음악과 예술은 곧 사람을 이해하는 매개체이자, 세상을 알게 하는 소재에요. 박종호 대표는 풍월당 아카데미의 월간 강의 중 '예술작품에 나타난 장애인⋅유색인종⋅성수소자 등 소외된 사람들을 다뤘던 강의 내용을 토대로 [예술은 언제 슬퍼하는가]라는 책을 내기도 했고요. 위대한 여성 미술가였으나 연인인 칸딘스키에 가려졌던 [가브리엘레 뮌터]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고, 음반의 수익금을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위해 기부하기도 하죠. 이처럼 풍월당에게 음악은 개인이라는 세계가 사회라는 세계와 관계 맺고 또, 참여하는 매개체가 되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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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월당
세계의 확장
사전에 '음악'을 검색해보면 박자, 가락, 음성 따위를 갖가지 형식으로 조화하고 결합하여 목소리나 악기를 통하여 사상 또는 감정을 나타내는 예술(청각적, 시간적 예술) 이라는 정의가 나와요. 다른 것보다 '시간적 예술'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어요. 사실 저는 클래식 음악을 아주 잘 알지는 못해요. 그런데 이 단어를 보고 나니 다소 멀게 느껴졌던 '클래식’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가깝게 느껴졌어요. 시간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가치이듯 클래식 음악이 누군가의 감정과 심리가 담긴 것이라면, 나도 사람이니 어쩌면 이해해 볼 수 있겠다고요.
의사와 음악의 세계를 모두 경험해 본 박종호 대표와 풍월당의 이야기를 보면서 한 사람이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구축해나가는 과정을 살펴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박종호 대표는 "어떻게 의사에서 음반 가게 주인이 되었냐"는 질문에 저서 [가운을 벗은 의사들]에서 이렇게 말해요. '우리가 인생을 두 번 살 수는 없겠지만, 한 번 살더라도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라고요. 세상을 이해하는 두 가지 눈을 가진 박종호 대표가 어쩐지 부러웠답니다. 물결님은 어떤가요. 무엇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있나요? 지금 얼마쯤의 세계에 도착해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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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8일 목요일,
돌멩이레터 24호가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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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comment ✏️
며칠 전이에요. 야근을 마치고 택시를 타고 집에 가던 중이었어요. 코너를 꺾어 도로에 진입하던 때였는데요. 어떤 택시 기사님이 타이어를 갈고 계시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곤 제가 타고 있던 택시 기사님이 "이 피크 시간에 장사를 못 하고 있네"라고 하시더군요. 순간 시계를 보게 되더라고요. 디지털 시계가 출력하고 있는 숫자는 23:35. 문득 다른 세계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밤 11시 35분을 피크 타임이라고 말하는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하고요. 생각해보면 우리는 매일 다른 세계들을 접해요. 전철 기관사의 세계, CEO의 세계, 동물의 세계, 부모의 세계, 동생의 세계. 겪어보지 못한 세계가 많지만, 또 생각보다 많은 세계를 지나왔어요. 어른이라는 세계, 연인이라는 세계, 팀장이라는 세계, 어쩌면 겪게 될 부모의 세계까지도요. 오늘은 가고 있고, 이미 내일이 오고 있는 지금. 산다는 건 어쩌면 끊임없는 세계의 확장일지도요.
🪨 오늘 돌멩이를 던진 이는 에디터 초이입니다.
사람과 브랜드를 좋아해요. 매력적인 브랜드 뒤에는 늘 매력적인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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