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에서 자주 사용하는 개념 중 보이드(void)와 솔리드(solid)라는 개념이 있어요. 말 그대로 빈 공간을 보
건축에서 자주 사용하는 개념 중 보이드(void)와 솔리드(solid)라는 개념이 있어요. 말 그대로 빈 공간을 보이드, 무언가로 채워져 있거나 양감이 있는 덩어리를 솔리드라고 합니다. 흔히 건축이라고 하면 벽을 세우고 천장을 얹는 등 무에서 유를 만드는 일을 떠올리기 쉬운데요. 의외로 건축은 비우는 일, 즉 보이드를 디자인하는 일에 가까울 때가 많아요. 잘 설계된 건축물이나 도시는 물결님의 숨을 탁 트이게 할 로비와 중정, 공원과 광장을 가지고 있죠. 이런 공간은 결코 우연히 남아서 생긴 게 아니에요. 무언가를 채우는 일만큼이나 세심하고 정교하게 비운 결과물이랍니다.
오늘 물결님에게 소개해드릴 브랜드는 이런 '비움'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MMCA)'이에요. 국립현대미술관은 덕수궁관, 과천관, 서울관, 청주관 총 4개 관을 운영하고 있어요. 그중 2013년 대대적인 리브랜딩과 함께 서울 종로구 삼청동 일대에 문을 연 '서울관'을 자세히 다뤄보려고 합니다. 오늘 레터를 통해 물결님도 비우는 일에 관해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 초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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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피치의 트리뷰나, 조파니(Tribuna of the Uffizi, Zoffany), 17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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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래요. 본격적으로 미술관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전,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부호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소장품을 전시하는 공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개인의 욕구와 인간성을 엄격히 통제했던 중세 암흑기를 벗어나 개인에게 주어진 부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초기 전시 공간은 물결님이 알고 있는 요즘 미술관과 달리, 벽면부터 천장까지 작품이 빼곡히 들어찬 모습을 하고 있어요.
이후 프랑스 혁명과 계몽사상 등이 맞물리며 대중에게도 개방된 미술관이 등장하게 되는데요. 여전히 작품 전시가 주목적이었던 탓에 공간에서 빈 틈을 찾기는 어려워요. 시간이 흘러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맞이하며 미술관은 비로소 관람객과 소통하고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경험 중심의 전시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물결님이 지금 떠올리는 바로 그 모습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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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미술관은 권위와 과시에서 친근함과 소통으로, 경직에서 유연함으로,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그 존재 가치를 바꿔왔어요. 단순히 예술 작품을 대중에게 보여주고 소장·관리하는 기능 차원을 벗어나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브랜드'로서 도시에 자리 잡았죠. 런던 하면 테이트 모던이, 뉴욕 하면 MoMA가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것처럼요.
국립현대미술관도 이런 변화에 합류했어요. 1969년 경복궁에 있던 작은 전시실에서 시작한 국립현대미술관은 1986년 과천관을 시작으로 1998년 덕수궁관, 2013년과 2015년 차례로 서울관, 청주관을 개관했어요. 서울관의 문을 열면서부터는 당시 개관 예정이었던 청주관까지 4개 관을 아우르는 통합 브랜딩을 개발하고, 과거 권위적인 미술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답니다. 오늘 돌멩이레터에 국립현대미술관을 '브랜드'로 소개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조금 멀고 무겁게 느껴졌던 국립현대미술관이 지금의 MMCA가 되기까지 부단한 '비움'의 과정이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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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둔 자리에 들어차는 무한한 가능성
'미술관의 주인은 미술관이 아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브랜딩은 이 한 문장에서부터 시작되었어요. 미술관은 작품과 사람을 담아낼 수 있는 빈 곳이어야 하는 거죠. 그래서 불투명하고 막혀있는 벽 대신 국립현대미술관은 '창(window)'이 되기로 합니다. 국경 없는 현대 미술을 다루고 있는 만큼, 국립현대미술관의 영문명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의 약칭인 MMCA을 공식 이름으로 선정했어요. 그다음 MMCA 알파벳 네 글자를 겹쳐 MI(Museum Identity)를 개발했고요. 여기에 굳이 한국을 투영하지는 않았어요. 대신 MMCA가 추구하는 방향성인 '소통'에 더 집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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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실루엣만 봐도 국립현대미술관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지만, 처음 이 심벌을 봤을 때 한동안 꽤 낯설어했던 기억이 나요. 물결님은 어떠셨나요? M-M-C-A 알파벳이 불규칙하게 배열된 이 심벌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어요. 선을 두껍게 늘려 면을 만들고, 그 면 안에 패턴이나 전시 이미지를 삽입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이런 방법을 통해 MMCA의 심벌은 과거부터 현재, 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이란 텍스트를 강조하는 대신 그 자리를 비워둠으로써 무한한 가능성과 유연함을 택한 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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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에 얽매이지 않은 역동적인 느낌의 MI와 함께 전용 국문 서체를 개발한 점도 인상 깊어요. 산돌커뮤니케이션과 협업해 만든 MMCA 고딕은 초성, 중성, 종성을 리듬감 있게 조합하되 가독성 또한 놓치지 않은 서체예요. 심벌이 브랜드를 드러낸다면 서체는 관람객과 직접 소통하는 역할을 하죠. 국립현대미술관에 방문한면 물결님도 안내 표시, 책자 등 실질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모든 곳에서 MMCA만의 서체를 만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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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 더 낮고 더 깊어지는 방식으로
본디 미술관은 전시라는 분명한 기능과 목적을 가진 공간이지만, MMCA 서울관은 아무런 목적 없이도 사람들이 이 공간을 누릴 수 있길 바랐어요. 일반적으로 대규모 전시가 열리면 많은 관람객이 미술관에 모였다가 전시가 끝나면 그 수가 확 줄어들곤 하는데요. 블록버스터 전시가 없더라도 항상 사람들이 오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미술관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야 해요. MMCA의 경우 '마당'이 바로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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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관에 도착하면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을 마주 보고 있는 낮고 붉은 벽돌 건물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어요. 일제 강점기엔 일본군 병원이었고, 박정희 군부 독재 당시엔 국군기무사령부로 쓰였던 이 벽돌 건물 뒤로는 조선 시대 왕실 업무를 보던 전통 건축물인 경근당과 옥첩당이 자리하고 있어요. 이런 과거의 흔적과 더불어 경복궁, 북촌 한옥마을 등 주변 환경을 모두 아우르기 위해 새로 지어지는 건물은 모두 납작하고 땅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답니다.
여기서, 지어진 시대도 모습도 제각각인 건물들을 유기적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바로 '마당'이 해줘요. MMCA 서울관에는 총 6개의 마당이 있습니다. '열린 마당'은 삼청동길에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장소예요. 바로 옆 '미술관 마당'에는 대형 작품이 설치되거나 다양한 공연이나 이벤트가 열리기도 하죠. 이어서 '종친부 마당'은 서울관의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듬뿍 느낄 수 있는 곳이에요. 그 외에도 지하 전시장에 자연광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전시 마당', 담 너머 경복궁 지붕이 보이는 '공중 마당', 디지털 도서관 앞 '도서관 마당'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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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CA 서울관은 이렇듯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을 설계하고 배치함으로써 의도적으로 보이드(void)를 강조했어요. 덕분에 서울관 주변 도로 4면 어디서든 전시실로 접근할 수 있고, 아예 마당을 가로질러 서울관을 통과하는 것도 가능해요. 무엇보다 '빈 공간'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답니다. 물결님도 이곳에 오면 텅 빈 마당이 주는 넉넉함과 시선을 옮길 때마다 느껴지는 풍경의 다채로움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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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의 가치는 미술관 내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요. 마당이 바다라면 각 전시실은 섬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섬들이 고립되거나 폐쇄적인 느낌을 주지 않도록 4에서 17미터까지 다양한 층고를 전시실에 적극적으로 활용했어요.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도 최소화하고, 외벽은 투명한 재질을 사용해 어디서든 빛이 들어오게끔 설계했죠. 아마 밖에서 볼 땐 이렇게 넓고 뻥 뚫린 공간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거예요. 이렇듯 MMCA 서울관은 일방적으로 작품을 보여주던 과거와 달리 관람객의 자유도를 높이고 직접 참여할 틈을 내어주는 오늘날 미술관의 가치를 잘 담아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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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공간을 하나하나 뜯어 소개해드렸지만, 사실 이렇게 공간을 자세히 알아볼 필요도 없어요. 물이 낮은 곳, 빈 곳을 향해 흐르듯,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모든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MMCA 서울관의 매력이거든요. 이곳엔 이렇다 할 담장도 문도 없답니다. 도시와 미술관 사이에 아무런 경계가 없죠. 그래서인지 근처 다른 미술관에 갔다가도, 약속 시간을 기다릴 때도, 산책하다가도 잠시 앉아 머무르게 되는 곳이 바로 MMCA 서울관이에요.
흥미로운 점은, MMCA가 이런 물리적 경계만 없앤 게 아니라는 거예요. 마당에서 사람들의 자유로운 활동이 일어나는 동안 건물 내부와 온라인에서는 MMCA가 마련한 프로그램들이 활발하게 진행됩니다. 작품 감상 교육부터 청소년 대상 워크숍, 노인 대상 실기 수업, 도슨트 양성 프로그램, 장애인이나 다문화 가정을 위한 체험 등 그 종류도 범위도 다양해요. 말 그대로 '경계 없는' 미술관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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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어떤 이유에서 '브랜드'로 인식되는지 생각해 봅니다. 어떻게 비우고 채울 것인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얼마큼의 자율을 줄 것인가. 이런 것들을 치열하게 고민한다는 점에서 건축은 브랜드와 닮아있는 것 같아요. 비움과 채움, 각각이 줄 수 있는 가치를 이해하고 이를 잘 활용할 줄 안다면 좋은 공간과 좋은 브랜드도 더 많이 생기지 않을까요? 머무르고 싶고, 자꾸 들여다 보고 싶은 '살아있는' 공간과 브랜드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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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6일 목요일,
돌멩이레터 15호가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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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comment ✏️
물결님, 혹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라고 들어본 적 있나요? 모든 자연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한다는 법칙이에요. 물론 사람도 이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언젠가는 규칙적인 심장 박동과 피의 순환이 멎고 죽음이라는 무질서에 가 닿죠. 하지만 독특하게도 사람은 이 법칙을 종종 거스르며 살아가요. 언어를 통해 발산하는 생각을 정리하고, 회화나 음악으로 감정을 다스리고, 정해진 규칙 안에서 몸을 움직이며 의식을 통제해요.
이렇게 엔트로피를 의도적으로 낮추는 순간을 좋아해요. 그래서 책이 좋고 예술이 좋습니다. 미술관도 마찬가지예요.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휩쓸려 살아가고 있다고 느껴질 때 '나'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곳 중 하나거든요. 공중에 부유하는 사고를 잡아다가 옆에 앉혀놓고 가만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인 것 같아요. 꼭 오늘 소개한 국립현대미술관이 아니더라고 물결님도 '잘 비워진' 물결님만의 장소를 한 곳 쯤 가지고 있길 바랄게요.
🪨 오늘 돌멩이를 던진 이는 에디터 초록입니다.
초록을 좋아해요. 공간과 종이, 텍스트도요. 글과 공간에 관한 브랜드를 주로 소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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