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님, '너답다'라는 말 혹시 들어본 적 있나요? 반대로 누군가에게 한 적은요? 왠지 '나다운 게 뭐 돌멩이레터 11호 | 도큐먼트
반복과 차이가 만드는 고유함 |
|
|
물결님, '너답다'라는 말 혹시 들어본 적 있나요? 반대로 누군가에게 한 적은요? 왠지 '나다운 게 뭐야'라고 되물어야 할 것만 같은 이 세 글자엔 사실 어마하게 많은 정보가 들어있어요. 물결님이 살아오며 보고 듣고 느낀 것들, 그 경험을 기억하는 방식,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내린 판단, 조금씩 변하거나 혹은 변하지 않으며 차곡차곡 쌓인 취향, 습관, 생각, 가치관 등등. 물결님 일생을 거의 통째로 그러모아야 '물결다움'을 겨우 설명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인지 '나다움'을 생각하면 단편적인 하나의 값이 아닌 ‘폴더'가 떠올라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정보가 그 폴더 안에 들어있는 거죠.
오늘 소개할 '도큐먼트(Document)'는 그런 폴더 같은 브랜드예요. 한 번에 강렬한 인상이나 메시지를 던지기보다 서로 오래 대화하며 조금씩 알아가는 '도큐먼트다운' 옷을 만들고 있습니다. 올해 15번째 컬렉션을 내며 짧은 필름과 함께 'Wildflower'란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발매하기도 했는데요. 오늘 레터를 읽으며 같이 들어보시길 추천해요. 반복되는 피아노 선율 아래 조금씩 변주하는 멜로디가 정말 아름다워요.
- 초록 드림
|
|
|
도큐먼트(Document)는 2015년 한 해외 트레이드 쇼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어요. 12년간 여러 패션 브랜드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던 이종수 디자이너가 오랜 준비 끝에 '도큐먼트'란 브랜드를 선보였던 거죠. 절제된 컬러와 좋은 원단을 사용하고,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 더 집중하며 런칭 이후 지금까지 매년 봄·여름 / 가을·겨울 두 차례 컬렉션을 내고 있습니다. 이종수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막연히 개인 브랜드를 생각해 왔는데요. '언젠가는 하게 되겠지'라는 희미한 다짐이 10년 넘게 변하지 않고 이어지자 어느 날 '이제 정말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고 해요.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생각이 변치 않으면 자연스럽게 일은 시작되는 것 같아요.”
- 이종수 디자이너 (슬로우스테디클럽, 2015.11)
|
|
|
도큐먼트는 4가지 아젠다(Agenda)를 가지고 있어요.
- My Document
트렌드나 특정 스타일에서 벗어나 디자이너 개인의 아카이브를 기록하는 라인이에요. 작지만 지속적인 변화를 이야기해요. 주로 기본적인 셔츠, 자켓·팬츠 셋업이 이 라인에 속합니다.
- Untitled Document
시즌, 연령, 성별에 관계없이 매일 입는 옷을 다루는 라인이에요. 좋은 취향과 분별 된 의식을 가진 이들의 개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도록 디테일과 컬러를 절제하고 최소한의 표현만을 남겨두었어요.
- Documentary
도큐멘터리는 여행의 기록에서 비롯된 시각적 요소들을 모티브로 삼은 라인이에요. 도시의 커다란 형태부터 작은 문에 칠해진 강렬한 색까지 다양한 요소들로부터 영감을 얻어요.
- Documentation
도큐먼트란 브랜드를 만들 때 영향을 받았던 예술, 책, 건축 그리고 사람을 통해 디자인을 풀어나가는 라인이에요. 도큐먼트만의 오리지널을 유니크하게 구현하는 라인으로, 다른 라인보다 디테일이나 장식적인 면이 조금 더 드러납니다.
|
|
|
이렇게 도큐먼트는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 아젠다를 가지고 브랜드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그중에서도 'My Document'는 브랜드의 중심이자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이에요. '도큐먼트'란 브랜드 이름도 여기에서 시작되었답니다. 이종수 디자이너는 누구나 자신만의 '마이 도큐먼트'란 폴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안에는 힘든 기억이나 좋은 기억, 개인의 경험 등 자신만의 특별한 것들이 채워져 있고요. 심지어 반복되는 일상적인 경험도 오랜 시간 축적되는 과정에서 특별함을 지니게 된다고 믿어요. 그래서 도큐먼트의 모든 제품에는 일련의 고유번호가 새겨져 있습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 번호처럼 같은 도큐먼트 옷이라도 물결님의 소중한 기억이 반영되어 물결님만의 '마이 도큐먼트'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도큐먼트의 출발점이에요.
|
|
|
1. 바셀린
다른 사람에게는 사소하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물건이 물결님에게도 하나쯤 있을 텐데요. 도큐먼트에서 옷을 구매하면 바셀린이 그려진 카드 한 장을 같이 받을 수 있어요. 이종수 디자이너에게 '바셀린'이 바로 그런 물건이기 때문이에요.
어렸을 적, 이종수 디자이너의 할머니께서는 몸이 편찮은 탓에 늘 누워계셨다고 해요. 그래서 항상 바셀린을 곁에 두고 물러진 피부에 연고를 바르곤 하셨는데요. 그 모습이 이종수 디자이너에겐 꼭 치유의 상징처럼 느껴졌어요.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어느 날, 집에서 문득 바셀린 케이스를 마주하고 그 기억을 떠올리게 됩니다. 누군가에겐 흔한 연고 케이스이지만, 또 누군가에겐 치유 그 자체로 기억된 거죠. 이렇듯 바셀린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오직 나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함'이란 도큐먼트의 철학을 관통하는 핵심 오브제예요.
|
|
|
2. 네이비 & 에크루
도큐먼트를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다른 하나는, 바셀린 케이스를 이루는 색이기도 한 네이비와 에크루 컬러예요. 먼저 에크루 컬러는 흰색을 기본으로 미약한 색조와 명도를 띈 오프 화이트 계열의 색이에요. 흰 종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래는 듯한 느낌을 이 컬러에 담았다고 해요.
네이비 컬러엔 재밌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요. 물결님, 잠시 흰 종이 위에 도장을 반복해서 찍는 상상을 해보실래요? 조금씩 엇나가겠지만 여러 번 찍다 보면 위치가 겹치면서 점점 진해지는 부분이 생길 거예요. 집합으로 치면 교집합 같은 부분이요.
이종수 디자이너도 이런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도큐먼트를 런칭하기 위해 그동안 모아 두었던 자료를 꺼내 보는데, 수없이 변해온 스타일 중에서도 꾸준히 겹치는 부분이 있는 거예요. 옷장을 열어보니 네이비색 옷만 같은 아이템으로 몇 개씩 있는 모습을 보고 '이거구나' 생각했어요. 그동안 수없이 변해 왔어도 그 자리를 지켜온 것들은, 앞으로 다시 10년이 지나도 꾸준히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 거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 개념이 바로 '반복과 차이'예요.
|
|
|
반복과 차이
도큐먼트가 매 시즌 선보이는 컬렉션은 REPETITION AND DIFFERENCE, 즉 '반복과 차이'란 조금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어요. 첫 번째 반복과 차이, 두 번째 반복과 차이… 이렇게요. 앞서 얘기한 바셀린과 네이비&에크루가 도큐먼트의 핵심 요소라면, '반복과 차이'는 그 둘을 아우르는 도큐먼트의 기본 철학이에요. 도큐먼트가 만들고 전하는 모든 제품과 이야기는 이 철학을 바탕으로 펼쳐진다고 봐도 무방하답니다.
|
|
|
©루앙 대 성당, 클로드 모네(Rouen Cathedral, Claude Monet) |
|
|
'반복과 차이'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아 나오게 된 개념이에요.
“ 반복되는 것들은 차이가 존재하며, 그 차이는 또 다른 반복을 만들어냅니다.
이 반복은 차이에서 비롯되지만, 그 차이는 다름이 아니라 곧 새로운 생성을 의미합니다.”
- 질 들뢰즈(Gilles Deleuze)
이렇게만 말하니 조금 알듯 말듯 한가요? 그렇다면 잠시 사과 이야기를 해볼게요.
기성 아카데미 화가들에게 사과를 그린다는 것은, 누가 봐도 사과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도록 불변하는 사과의 모습을 묘사하는 일이었어요. 정확한 밑그림과 사과의 색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하죠. 여기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게 바로 인상주의에요. 인상주의자들은 매 순간 빛에 의해 시시각각 변하는 사과를 포착하고 반복해서 그려요. 기성 화가들이 그리는 사과는 현실에 실재하는 사과가 아닌, 사과라는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죠.
들뢰즈가 말하는 '반복과 차이'는 바로 이 지점을 통해 설명할 수 있어요. 만약 눈앞에 보이는 사물이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똑같다면, 그걸 있는 그대로 똑같이 그려내는 일은 의미가 없죠. 세계는 매 순간 차이를 만들며 변화하고 이런 차이가 또 다른 반복으로 이어져요. ‘반복'은 더 이상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만들어내는 행위인 거예요. 모네의 수련 연작이나 루앙 대성당 연작을 떠올리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워요.
|
|
|
도큐먼트의 철학도 마찬가지예요. 도큐먼트는 매 시즌마다 완전히 새로운 콘셉트를 내놓지 않아요. 다만 조금씩 디테일을 달리하고 또 조금씩 새로운 컬러를 선보이며 미묘한 차이의 반복을 추구합니다. 첫 번째 컬렉션의 차이는 두 번째 컬렉션의 반복으로 이어지고 그사이에 생긴 차이가 다시 세 번째 반복으로 이어지는 식이에요. 도큐먼트에게 있어 '차이'는 계속해서 다음 컬렉션을 '반복'해나갈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
|
|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했지만, 반복과 차이를 통해 결국 도큐먼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개인의 '고유성'인 것 같아요. 우리의 하루하루가 그래요. 매일 같은 해와 같은 달이 떠도 조금씩 다른 하루를 살아가잖아요. 반복과 차이를 통해 시간을 겪고 나이를 먹으며 ‘나다움'에 점점 가까워져요. 도큐먼트는 이 일련의 과정, 그러니까 우리의 삶 자체가 도큐먼트의 옷에 시나브로 스미길 바라는 브랜드예요.
|
|
|
예를 들면 이런 식인데요. 도큐먼트의 옷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컬러 덩어리처럼 보여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면 질감이 보이고, 직접 입으면 디테일이 보이죠. 거기서 끝이 아니라 옷을 입고 생활하다 보면 그제야 비로소 보이는 더 작은 디테일들이 있어요. 단추 뒤에 새겨진 로고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단추가 너덜너덜해졌을 때, 혹은 우연히 단추가 떨어졌을 때가 돼서야 발견할 수 있어요. 같은 옷이라도 누가 어떻게 입고 어떤 생활을 했느냐에 따라 단추 뒤 로고를 발견하는 경험은 완전히 달라져요.
도큐먼트 이종수 디자이너는 옷을 만들 때 최대한 욕심을 덜어내려고 한대요.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강요하는 디자인이 아니라, 물결님과 천천히 대화하는 디자인을 하고 싶다고요. 새로운 형태를 뽐내기보다 언젠가 물결님이 물결님만의 순간에 새로운 발견을 해주길 기다려요. 그러니 누군가 억지로 정할 수도, 누가 대체할 수도 없는 오직 '물결님다움'만이 마이 도큐먼트를 만들 수 있는 셈이에요.
|
|
|
p.s. 오프라인 매장인 DOCUMENT CX STORE에는 커다란 나무 의자가 하나 있어요. 여기에 겉옷이 걸려 있으면 오픈, 그렇지 않으면 클로즈란 뜻이래요. '열려있어요, 들어오세요!' 대신 '맞이해 줄 사람이 안에 있어요. 들어오셔도 좋습니다'라고 돌려 말하는 거 조금 귀엽지 않나요?
|
|
|
4월 28일 목요일,
돌멩이레터 12호가 발행됩니다.
|
|
|
Editor's comment ✏️
고백해요. 어느 레터 하나 쉽게 쓴 적 없지만, 이번 호는 유독 글쓰기가 어려웠어요. 도큐먼트를 공부하고 알아갈수록 하나의 키워드가 잡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각이 점점 발산하기만 했거든요. 분명 이 브랜드가 꾸준히 이야기하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걸 한마디로 정의할 수가 없어 괴로웠어요. 몇 날 며칠을 좀비처럼 반복, 차이, 기억, 경험, 기록, 특별함, 고유함 이런 단어들을 입안에서 굴려보았어요. 그러다 문득 맥이 탁 풀렸죠. ‘와… 이것마저도 너무 도큐먼트다워...' 도큐먼트는 애초에 한 단어 혹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브랜드였던 거예요. 말 그대로 하나의 폴더였던 거죠. 그제야 이번 호의 첫 문장을 쓸 수 있었습니다. 비록 어렵게 쓴 글이지만, 바라건대 물결님에게는 쉽게 읽히는 글이면 좋겠어요.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저를 오래 봐온 친구가 “이거 너 같아”라며 웬 요상한 자세로 자라고 있는 식물 사진을 보내왔어요. 어이는 조금 없지만 어쩐지 정말 ‘저다운' 사진이라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초록다움 폴더의 커버 이미지로나 삼을까 봐요. 오늘 돌멩이레터를 통해 물결님도 ‘물결다움'이란 폴더를 한 번쯤 열어보게 된다면 저는 진심으로 기쁠 것 같습니다.
🪨 오늘 돌멩이를 던진 이는 에디터 초록입니다.
초록을 좋아해요. 공간과 종이, 텍스트도요. 글과 공간에 관한 브랜드를 주로 소개합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