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제 취향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 한 가지를 발견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서 '볼드한 걸 좋아하는구나' 돌멩이레터 55호 | 아무튼 시리즈
개인적인 보편성
근래에, 제 취향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 한 가지를 발견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서 '볼드한 걸 좋아하는구나'라는 얘기를 3번이나 들었거든요. 제가 듣는 음악을 통해서, 집을 채우는 소품을 통해서, 무심코 구매하던 소품의 색깔을 통해서요. 꽤 적확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어 저를 표현할 단어로 추가해두었어요. 오늘 레터에서 소개할 '아무튼 시리즈'를 처음 봤을 때도 같은 느낌이었어요. '아무튼 OOO' 이라는 제목을 달고 죽 나열된 책들을 살펴보며 '오, 나 이거 좋아했었네!'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생각하지 못했던,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 싶은 물결님에게 오늘의 레터가 즐겁게 읽혔으면 좋겠어요.
- 초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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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시리즈'는 특정한 한 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쓴 문고 시리즈에요. 아무튼 드럼, 아무튼 사전, 아무튼 아침드라마처럼 '아무튼' 뒤에 주제를 붙여 시리즈로 출간하고 있어요. 제가 아무튼 시리즈를 처음 마주한 건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어떤 서점에서였어요. 여러 편이 진열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중 눈에 띄었던 건 '아무튼 스릴러'편, '아무튼 양말' 편이었어요.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노란색 양말 한 짝이 표지에 그려져 있었죠. 표지도 눈에 띄었는데 제 시선을 잡은 건 부제였어요. 아무튼 양말 편의 부제는 '양말이 88켤레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에요. '응, 정말로 그런 것 같아'라고 생각하면서 홀린 듯이 책을 펼쳐봤었죠. 열다섯 살 때부터 양말을 사 모으기 시작해, 양말 가게에서까지 일하게 된 작가의 이야기였어요. 호기심에 펼쳤던 그 책은 제가 지인들에게 양말을 선물할 수 있도록 만들어줬어요. 지인들을 떠올리며 자주 입는 하의나 자주 신는 신발에 따라 어울릴 만한 컬러와 디자인의 양말을 고르면서, 취향은 어느 것에도 묻어날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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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yzorba
5년 남짓한 시간, 벌써 56권의 책을 발표한 아무튼 시리즈는 2017년 시작되었어요. 아무튼 시리즈는 1인 출판사인 코난북스, 위고, 제철소가 번갈아 가면서 출판하고 있어요. 그 중 코난북스의 이정규 대표의 제안이 아무튼 시리즈의 시작이었어요. 이정규 대표는, 서른한 살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출판일을 시작했어요. 보통 출판업계에서 일하게 되면 교정⋅교열 일을 가장 먼저 시작하는데요, 이정규 대표는 그보다 기획일에 더 뛰어났고 집중했어요. 성과도 꽤 좋았고요. 아무튼 시리즈는 다니던 출판사를 나와 1인 출판사를 차린 후 만들었어요. 아무튼 시리즈에는 '좋아서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어요. 좋아하는 이유나 대상, 방식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는 있다고 믿었죠. 그 한 가지의 세계를 열어보고 싶었죠. 그러나 1인 출판사로는 시리즈물을 내는 데 한계가 있을 것 같다고 판단했어요. 그 길로 같은 출판사 동료였던 위고의 이재현 대표와 제철소의 김태형 대표에게 아무튼 시리즈를 함께하기로 제안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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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아무튼 뒤에 뭘 붙일 때마다 그 이야기가 너무 궁금한 거예요. 누군가 평생에 걸쳐 열중하는 하나가 있다면 그게 뭘까. 원래 작은 사생활의 역사가 모여 큰 역사가 완성되잖아요. 1인출판사가 시리즈를 내는 건 부담이 크지만 같이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 제철소 이재현 대표(한국일보, 2017)
고민하던 제철소와 위고 출판사가 합류하기로 하면서 곧 5개의 아무튼 시리즈가 공개되었어요. '아무튼 피트니스'(류은숙), '아무튼 서재'(김윤관), '아무튼 게스트하우스'(강성민), '아무튼 쇼핑'(조성민), '아무튼 망원동'(김민섭)편이었죠. 1번 책은 아무튼 피트니스로 인권운동가인 류은숙 작가가 피트니스를 통해 겪은 삶의 변화를 담았어요. 그 후로 지금까지 2-3개월마다 신간을 발표하고 있어요. 여기에는 '발레', '술', ‘달리기', '후드티' 같은 취향이나 취미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도 있고요. '딱따구리', '계속', '사전' 처럼 어떤 얘기를 하려고 쓴 것일까 하는 시리즈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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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세 출판사가 하나의 시리즈를 함께 운영하기 때문에 일할 때는 더욱더 철저한 분업 체계를 갖추고 있어요. 각 출판사가 차례에 맞게 기획에서 필진 섭외, 제작까지 담당해요. 처음 출간되었던 책으로 보자면, '아무튼 망원동'과 '아무튼 서재'는 제철소의 책, '아무튼 쇼핑'과 '아무튼 게스트하우스'는 위고의 책, '아무튼 피트니스'는 코난북스에서 펴낸 책이죠. 놀라운 건 각 출판사에서 원하는 기획과 필진을 꾸리는데요. 겹친 적이 없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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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렇게 기획은 3개의 출판사에서 번갈아 가면서 하는 반면에 시리즈라는 통일감을 주기 위해 디자인은 한 명의 디자이너가 담당해요. 또, 책 표지에는 제목과 저자 이름만 노출하고 있어요. 출판사는 의도적으로 표지에 기재하지 않았죠. 이렇게 함께 역량은 합치되, 서로의 색깔을 유지하고 존중하기 위한 장치들을 마련하고 또 지켜왔어요. 그 덕에 우리가 아무튼 시리즈를 시리즈로 인식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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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아무튼 시리즈가 역시 제일 많이 중점을 두는 건 필진이에요. 150p가 하나의 주제에 대해 오로지 한 명의 필진의 이야기로 채워지기 때문이죠. 3개의 출판사는 1인 출판사라는 점을 적극 활용했어요. 대기업라면 선택하지 못했을 더 사적이고 개인적인 필진을 찾아 나섰죠. 그러다 오히려 영향력 있는 필진과 함께 하기도 해요. 식물에 대해 써줄 사람을 찾다가, 트위터에 매일 자신이 키우는 식물 사진을 올리던 사람에게 연락했더니 뮤지션 임이랑이었고, 피아노에 대해 써줄 사람을 찾다가 유튜버 김겨울과 연결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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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ksbooks, aladin
필진이 아무튼 시리즈를 먼저 찾아오기도 해요. 많이 알려진 시리즈 중 하나인 '아무튼 양말'을 쓴 구달 작가는 '아무튼 스웨터'(김현)을 보고, 스웨터에 관해서만 쓰는 게 가능한 출판사이니 양말도 가능할 거야. 라는 생각으로 먼저 아무튼 시리즈 측에 연락을 해왔고요. 가장 많이 팔린 시리즈인 '아무튼 술'을 쓴 김혼비 작가 역시 '아무튼 방콕'(김병운)편을 보고 먼저 제안해 왔어요. 150p 내의 작은 문고로 만들어진 아무튼 시리즈가 읽는 사람에게 큰 부담 없이 책을 열게 만드는 것처럼, 필진에게도 마찬가지죠. 실제로 아무튼 시리즈를 쓴 작가의 상당수는 처음 글을 쓴 사람이라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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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ksbooks
끊기지 않고 시리즈로 출간되어 온 만큼, 아무튼 시리즈를 애정하는 사람이 많아요. 포털 검색창에 아무튼을 입력하면 관련어에 아무튼 시리즈가 자동으로 노출되기도 하고요. 인기작 중 하나인 '아무튼 술'(김혼비)편은 출간 3개월 만에 9,000부가 팔리기도 했어요. 때로는 '아무튼 OOO'이 보통 명사처럼 쓰이기도 해요. '아무튼 OOO 글짓기'라고 해서 매주 주제를 바꿔가며 글을 짓는 모임이 열리는 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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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위고
세계관을 보여주는 요즘 세계관이라는 단어를 자주 들어요. 주로 게임이나 영화 같은 콘텐츠에서 쓰이다가 지금은 브랜드도 세계관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죠. 아무튼 시리즈는 일종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웨터를 통한, 서재를 통한, 서핑을 통한 누군가의 세계관. 그리고 스웨터, 서재, 서핑 그 자체의 세계관도요. 무심코 일상이라고 지나쳐 온 것의 세계를 열어보는 기분이죠. 때로는 이를 조금 더 다채롭게 느낄 수 있도록 이벤트를 운영하기도 해요. 아무튼 외국어편과 유대인에게 페르시아어를 배우는 독일군 장교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페르시아어 수업>과 이벤트를 연계하거나 '아무튼 식물'편을 쓴 임이랑 작가와 수업을 열기도 하는 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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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thanksbooks
공감 : 지극히 개인적인 보편성 사람들이 아무튼 시리즈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공감이에요. 때로는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보편적인 설득력을 지니기도 해요. 아무튼 시리즈 리뷰를 찾아보면 웃기다, 슬프다, 찡하다, 위로받다 등 감정의 키워드가 많이 읽혀요. 그만큼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다는 뜻이죠. 떡볶이는 다 좋지만, 사실 다 좋다고 말하는 건 귀찮음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말하는 작가를 통해 나 역시 조금 더 좋아하는 떡볶이가 있음을 발견하기도 하고,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끼니를 떡볶이로 결정하는 것까지. 나와 관심사가 같은 누군가의 관심사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누군가의 아무튼을 통해 몰랐던, 나의 아무튼을 발견하기도 하는 것이죠.
사실 제게 '아무튼'이라는 단어는 다소 얼렁뚱땅 결론을 지으려고 할 때 자주 쓰던 단어예요. 설명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데 하나하나 설명하기 어렵거나 번거로울 때 자주 쓰죠. 레터를 쓰면서 이 단어를 다시 들여다보게 돼요. 나에게는 아무튼 다른 이유는 됐고, 그냥 좋은 책 한 권을 쓸 만큼의 '아무튼'이 있는지 묻게 돼요. 물결님은 어떤가요. 물결님이 아무튼 시리즈를 쓴다면 무엇을 쓰고 싶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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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고
조소정 대표는 원고를 보다가 자신에게 아무튼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 받았다"고 했다. 얼마나 떠밀려 살았기에 지금까지 붙들고 있는 게 하나도 없나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시리즈가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내 아무튼은 뭘까'란 질문을 던지는 거죠. - 한국일보 (조소정 위고 공동대표 인터뷰 기사, 2017)
5월 11일 목요일,
돌멩이레터 56호가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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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comment ✏️
그런 질문 많이 받는데요. 취미가 뭐냐, 좋아하는 가수는 누구냐, 무엇을 좋아하느냐.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이런 질문이 어려웠어요. 한 가지를 몇 년간 해왔다거나, 한 가지를 수십 개쯤은 모아야 그 질문에 적합한 대답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지금 출근 시간보다 2시간 정도 일찍 와서 글을 쓰고 있는데요.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어요. '나, 이 시간을 좋아했던가?' 초・중학교 시절, 집에서 신호등 하나 건너에 학교가 있었어요. 그래서 종종 일찍 학교에 가곤 했는데요. 그때의 혼자 집중하는 시간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 기억이 지금도 남은 건지, 지금도 주에 한 번씩은 그런 시간을 가져요. 월요일.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일찍 출근해서 저만이 아는 여유를 가질 때, 아무튼 좋다고 생각해요. 물결님에게도 오늘의 레터가 물결님의 아무튼을 발견하는 작은 단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 오늘 돌멩이를 던진 이는 에디터 초이입니다.
사람과 브랜드를 좋아해요. 매력적인 브랜드 뒤에는 늘 매력적인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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