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님, 지금 주변을 한 번 둘러봐요. 책상, 의자, 창문, 천장… 밖이라면 도보와 상점, 건물의 창문과 돌멩이레터 47호 | 윤현상재
사람 그리고 사람
물결님, 지금 주변을 한 번 둘러봐요. 책상, 의자, 창문, 천장… 밖이라면 도보와 상점, 건물의 창문과 출입구, 계단이나 난간, 대중교통의 손잡이 같은 게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혹시, 그 사물이 왜 그 크기로 그 위치에 만들어졌는지 생각해본 적 있나요? 당연한 얘기지만 사람이 만든 많은 사물은 사람이 쓰기 위한 것들이에요. 따라서 사람의 몸과 동작, 감각으로부터 사물의 크기와 위치를 정하게 되죠. 이런 개념을 '휴먼 스케일'이라고 해요. 가령 계단 한 칸의 너비와 높이 합이 45cm일 때 오르내리기 가장 편하다든지,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위해선 적어도 120cm 이상의 폭이 필요하다든지 하는 것들인데요. 물리적인 신체뿐 아니라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는 최소폭부터 상대방의 표정을 알 수 있는 거리, 얼굴을 구분할 수 있는 거리, 냄새나 소리가 퍼질 수 있는 거리까지 사람이 사용하고 감각하는 모든 방면을 아우르는 개념이 바로 휴먼 스케일이랍니다. 이 휴먼 스케일을 섬세하게 고려한 공간일수록 우리는 편안함을 느껴요.
오늘 소개할 브랜드는 딱딱하게 말하자면 타일을 비롯해 다양한 건축 마감재를 다루는 자재 전문업체예요. 하지만 이곳의 이름을 말했을 때 업체를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언제나 사람을 관찰하고, 사람의 눈높이에서 소통하며 사람과 사람이 살고 싶은 공간을 이야기하기 때문이죠. 누구보다 휴먼 스케일에 진심인 브랜드 '윤현상재'를 오늘 물결님에게 던져드립니다.
- 초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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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상재
윤현상재(이하 윤현)의 시작은 1996년 논현동의 타일 가게였어요. 여느 타일 유통업체와 다른 점이 있다면 초점을 최종 소비자에 두었다는 건데요. 이게 왜 특별하냐면요, 일반적으로 건축자재 업체는 B2B로 이익을 얻어요. 업체와 업체끼리, 업체와 시공사끼리 제품을 납품하고 받으며 시장이 돌아가기 때문에 물결님과 같은 개인 소비자와 접점을 만드는 경우는 잘 없죠. 윤현은 이런 시스템을 과감히 깼어요. 타일을 시공할 회사가 아니라 타일이 시공된 후 매일 그 공간을 사용할 사람 한 명 한 명을 생각한 거예요.
대상이 다르니 브랜딩도 브랜드의 목소리도 모두 다를 수밖에 없었어요. 시공사를 대상으로 수량과 단가 등 숫자로 표기된 경쟁력을 내세우는 대신, 윤현은 최종 소비자에게 타일과 사람 중심의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어요.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블로그 등 온라인 채널로도 꾸준히 소통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직접 고객을 만날 수 있는 오프라인 접점을 포기하지 않았죠. 윤현상재를 단숨에 화제의 브랜드로 만든 플리마켓 '보물창고'가 대표적인 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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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상재
윤현상재 하면 이 '보물창고'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어요. 그 배경은 이렇습니다. 약 10년 전, 셀프 인테리어나 집 꾸미기 같은 키워드가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하던 때였어요. 가구나 소품을 넘어 자기만의 취향이 담긴 조명이나 벽지, 타일을 직접 고르고 시공할 수 있다는 데 대중이 눈을 뜨기 시작했죠. 이런 시류를 윤현은 일찍이 읽었어요. 살고 싶은 집을 꿈꾸는 이들을 위해 좋은 인테리어 사례나 자재 브랜드를 엄선해 블로그에 소개했는데 이게 '보물창고'의 시작이 되었어요. 윤현이 소개하는 자재나 인테리어를 직접 보고 만져보고 싶다는 고객들의 요청이 있었거든요. 그렇게 전부터 소소하게 진행하던 플리마켓에 기획을 입혀 2016년, 첫 번째 보물창고 <It’s all about Interior>를 열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게 된 첫 번째 보물창고에 경찰까지 동원되는 일이 발생했어요. 가볍게 시작한 일이었고, 크게 홍보도 하지 않아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몰릴 줄 몰랐던 거예요. 일대가 마비되면서 경찰이 출동하고 행사는 중단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 일은 윤현상재에게 뼈아픈 경험이자 동시에 고객의 목소리를 듣는 기회이기도 했어요. 집을 꾸미는 데 사람들이 얼마나 큰 관심이 있는지, 그런 고객의 갈증을 어떻게 채워줄 수 있는지를 돌아보고 윤현의 역할을 다시 정립하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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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상재
좋은 공간 사진을 올리면 많은 분이 타일뿐 아니라 함께 연출된 제품에도 관심을 가지곤 하잖아요. 그런 호기심이 예쁜 쓰임이 되길 바라며 윤현상재는 이후 <예쁜 호기심>이란 이름으로 두 번째 보물창고를 열었어요. <Excuse me>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예쁘고 쓸모 있지만 작은 흠집이 있거나 오래된 이월상품을 선보이기도 했고요. 첫 번째 행사를 교훈 삼아 본격적으로 고객이 원하는 지점을 파고들고, 명확한 주제와 콘셉트를 가진 온오프라인 콘텐츠를 선보이며 윤현상재는 인스타그램에만 21만 명이 넘는 팔로워가 있는, 자재 업계에서는 아주 드물게 '팬덤'이 있는 브랜드로 자리 잡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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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상재
윤현상재 최주연 부사장님은 '잘하는 것에 집중하고 잘하지 못하는 건 하지 말자'는 주의라고 해요. 윤현이 잘하는 타일과 고유한 소통 방식, 기획에 에너지를 쏟고 그 외 다양성을 보여주는 일은 협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요. 소상공인 플리마켓으로 시작했던 '보물창고'도 협업을 통해 전혀 예상치 못한 축제나 전시, 행사로 자유롭게 모습을 바꿨죠.
우선 2017년, 18년 현대백화점의 제안으로 두 차례 팝업을 유치했어요. 현대백화점은 단순히 쇼핑을 하기보다 재밌는 경험과 공간을 즐길 수 있는 장소로 더 유명하잖아요. 이런 장소의 힘을 잘 활용해 윤현은 다양한 분야의 디자이너, 건축가와 함께 전시 요소를 많이 마련했어요. 백화점 복도부터 홀, 야외 공간까지 허투루 쓰지 않고 다양한 기획을 구성했고 고객의 반응은 역시 뜨거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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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엔 서울시와 협업하기도 했는데요.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행사 중 하나로 <을지공존>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을지공존>을 통해 과거와 현재,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익숙함과 낯섦 등 다양한 경계가 공존하는 을지로라는 장소를 윤현만의 시선으로 다뤘죠. 정해진 매뉴얼 없이 지역과 장소의 맥락으로부터 행사를 기획하는 만큼, 을지로 상권 이야기도 행사에 끌어들였어요. 상가에 머물고 계신 분들께 일일이 찾아가 협의를 받으며 기존의 전시 콘텐츠 외에도 공연과 기부 옥션 행사 등 다양한 참여형 프로그램을 기획했어요. 그 결과 지역 주민분들도 행사를 정말 좋아해 주셨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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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상재
같은 해 인테리어디자인코리아 전시홀 상당 부분을 담당하며 전시에 두각을 드러내기도 했어요. 기존 경향하우징페어를 리브랜딩 한 페어라는 점이 실질적으로도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부스 디자인, 참여 업체, 디자이너와 작가까지 적극적으로 함께 기획했어요. 윤현의 전시공간은 물론 여섯 번째 보물창고인 <Material Cube>도 함께 기획했고요. 자칫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자재 시장을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의 모습으로 쉽고 편안하게 보여주는 것이 목표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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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상재
이렇게 다양한 공간을 연출하고 기획하는 힘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 원천은 윤현상재 사옥에 있어요. 2011년 최주연 부사장님은 본사 3, 4층을 통으로 '스페이스 비이(Space B-E)'라는 이름의 갤러리로 만들었어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되기(Becoming)'라는 개념에서 따온 이름으로, 무언가가 되어가는 과정을 빈 그릇 안에 담아 가겠다는 뜻이라고 해요. 처음 갤러리를 열 때 주변에선 오래 못할 거라는 반응이었대요. 따로 입장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윤현의 제품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아니니 수익성을 생각하면 쇼룸을 둘 공간에 갤러리를 만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죠.
하지만 윤현은 이 공간에 건축가, 디자이너, 작가, 도자기 굽는 분, 목수, 콜렉터 등 다양한 사람이 경계 없이 모이고 전시를 즐기다 가길 바랐어요. 전시를 매개로 공간에 ‘이야기’를 담기로 했죠. 이런 은유적 방식은 윤현이 하는 일종의 투자예요. 당장 매출이 나진 않지만, 윤현의 메시지를 일관되고 의미 있는 언어로 전달하는 일이 브랜드를 지키는 힘이라고 믿거든요. 지금도 윤현은 스페이스 비이에 그 이름처럼 변화해야 하는 것들, 변화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꾸준히 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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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상재
윤현의 팬들은 건축이나 공간,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에요. 기민한 감각으로 공간과 예술을 탐구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죠. 윤현은 그런 윤현의 고객이 누구인지 늘 잊지 않아요. 그리고 이들을 위해 기꺼이 '놀이터'가 되어줍니다. 플랫폼이란 멋진 단어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어쩐지 윤현에게는 놀이터가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에요. 그네가 좋아서 미끄럼틀이 재밌어서, 모래와 풀잎이 신기해서 별다른 이유 없이도 언제나 모였다 헤어졌던 어렸을 적 놀이터를 떠올리면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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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상재
여기까지 쭉 읽으셨다면, 아마 윤현이 끊임없이 사업을 확장해왔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윤현의 목표는 확장이 아닌 성장에 있어요. 밀도와 깊이를 가지고 '잘 자라는 데' 훨씬 관심이 많죠. 윤현이 생각하는 브랜드는 마치 사람과 같아요. 알아서 막 자라나지 않고, 살아있는 생명과 같이 온 정성을 다해 천천히 키워야 한다는 점에서 둘은 비슷해요. 똑같은 일을 알아서 척척 반복하는 기계부터 정말 사람처럼 느껴지는 인공지능까지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발전하고 있어요. 하지만 윤현은 윤현만이 낼 수 있는 인간다움은 고유하다고 믿어요. 설령 브랜드가 커지더라도 물결님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특유의 '휴먼 스케일'은 잃고 싶지 않다고요.
그래서 윤현은 지금도 크지 않은 조직을 유지하고 있어요. 적정 범위 안에서 하고 싶은 일을 차근히 해 나가며 윤현만의 감도를 유지하기 위해서예요. 숫자의 확장보다는 '윤현스러움'을 꾸준히 보여주며 고객과 소통하는 것이 윤현에게는 더 중요해요. 마치 오래된 맛집이 초심을 잃지 않고 노포로 자리 잡아 사람 그리고 공간과 어우러지며 자연스럽게 진화하고 성장해 나가듯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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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상재
늘 사람의 크기로 다가서다 보니, 윤현이 하는 말은 시(詩)처럼 들리기도 해요. '이거 새로 나왔어요, 가격은 이렇고 이렇게 구매하세요' 대신 느긋한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인데요. 실제로 윤현상재 인스타그램을 둘러보면 21만 명이 팔로하고 있는 브랜드 공식 계정이란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아요. 새로 입고되는 타일을 보며 '파도가 일렁이는 실루엣과 가파른 산맥이 연속되는 모습이 떠오른다'든가 디테일이 남다른 코너타일을 소개하며 '가격이 사악하지만 한 번 지른다 하는 분에겐 후회 없을 것'이라는 인간적인 글들을 만날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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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상재
짧은 영상 하나를 소개하며 오늘 레터를 마칠게요. 몇 년 전부터 윤현은 윤현만의 콘텐츠를 영상으로 담아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고 있는데요, 그중 윤현상재 타일이 시공된 집이나 상점을 방문해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전하는 TT(Travel Tile) Log라는 시리즈가 있어요. 물결님께 소개하는 이 영상은 서울에서 땅만 3년 동안 찾았고 고민 끝에 쌍문동에 터를 잡은 어느 부부의 모습을 담은 3분짜리 기록입니다.
참고로 윤현상재의 '윤현(荺呟)'은 초목의 새싹이 돋아나는 소리란 뜻이에요. 그정도로 작은 소리도 귀 기울여 듣고, 초심을 잃지 않으며 늘 새로이 시작하겠다는 생명의 기운을 이름에 담았어요. 저는 이 영상을 보며 윤현이 듣고자 했던 그 소리가 저에게도 들리는 기분이었어요. 어떤가요. 물결님도 초목의 새싹 소리가 들리나요?
3월 9일 목요일,
돌멩이레터 48호가 발행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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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comment ✏️
세보진 않았지만, 오늘 레터를 쓰며 '사람'이란 단어를 아주 많이 썼어요. 그리고 잠시 건축 디자인 회사에 다녔던 기억도 많이 떠올랐습니다. 프로젝트 시공일이 다가오면 사무실로 자재 샘플이 하나둘 오곤 했거든요. 타일끼리 까랑까랑 부딪히는 소리, 무광 포셰린 타일을 쓸면 나는 버석한 소리, 손가락에 남는 거슬거슬한 촉감까지. 무엇보다 미묘한 색감과 마감처리 차이를 살펴보며 이 타일로 공간이 채워졌을 때 그곳에 있는 사람은 어떤 느낌을 받을까, 어떤 목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상상하는 게 즐거웠어요. 어린이들이 주로 생활할 공간은 모든 사물의 크기가 작아지고 설치하는 높이도 낮아져요. 그런 공간은 3D 모델링 화면만으로도 아기자기함이 느껴져서 작업하는 재미가 있었죠. 물론 자잘한 치수가 맞지 않아 머리를 쥐어뜯을 때가 더 많았지만요. 아무튼, 혹시 느껴졌는지요. 브랜드와 제품을 소개하고 브랜드가 펼치는 활동으로 이어지는 평소와 달리 오늘은 범위가 큰 활동부터 시작해 윤현의 사옥으로, 이름으로 조금씩 밀도를 더하는 방향으로 레터를 써보았어요. 윤현이 추구하는 밀도와 깊이가 물결님께 잘 전달되었길 바라며 이만 에디터 코멘트에도 마침표를 찍겠습니다.
🪨 오늘 돌멩이를 던진 이는 에디터 초록입니다.
공간과 텍스트를 좋아하고 이 둘의 힘을 믿어요. 즐겁고 편안한 상태를 꿈꾸며 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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